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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297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종현

[정의]

조선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인 조선시대 양주목 해등촌면은 그리 큰 행정 구역이 아니었으나, 지리적 특성으로 정치·경제·사상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행정 구역과 인구]

서울특별시 성북구와 강북구 등 도봉구 인근 지역은 일부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도봉구 지역은 한성부의 관할 구역인 성저(城底) 약 3.93㎞[10리]와 이웃한 양주목 소속의 지역이었다. 각종 지리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현재의 도봉 지역은 조선시대의 행정 편제상으로는 양주목 해등촌면에 해당한다. 해등촌면에 관한 기록이 조선 초의 지리지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여말 선초에는 양주의 한 관할 구역으로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양주목 역원조의 기록에서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해촌’이 곧 해등촌면을 지칭하며, 덕해원누원점(樓院店)인 것으로 추정된다. 1765년(영조 33)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해등촌면이라는 명칭이 명확하게 등장하며, 거주하는 인구는 379호에 1,552명으로 당시 양주목의 34개 면 중에서는 중간 정도의 규모에 해당하였다.

역시 18세기 후반의 자료인 『호구 총수(戶口總數)』에서는 해등촌면 내에 영국리(靈國里)·누원리(樓院里)·암면리(巖面里)·소라리(所羅里)·우이리(牛耳里)·마산리(馬山里)·각심리(覺心里) 등이 있고, 총 448호에 1,52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 또한 해등촌면양주목의 관할 면 중에서 중간 규모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해등촌면의 위치에 관한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여지도서』에서는 해등촌면이 “남쪽으로 관아와 가장 가까운 곳은 30리, 가장 먼 곳은 50리”라고 하였으며, 정조 대의 기록을 후대에 다시 필사한 『양주군 읍지(楊州郡邑誌)』[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에 의하면 그 경계가 “주 남쪽 30리에서 50리까지”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 또한 이와 일치하여 남쪽으로 30리에서 50리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이 조선 전기로부터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행정 구역의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각종 지리지 및 지도류에서 해등촌면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해등촌이라는 명칭은 해등촌면 주위에 흘렀던 소군내라는 하천의 물이 마치 바닷물처럼 깨끗하여 해등천(海等川)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듯하다. 해등촌면은 조선시대에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노원면(蘆原面)과 통합되어 노해면(蘆海面)으로 개칭되었다. 통합된 이후에도 노해면은 계속 양주에 속하였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하였다.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자 옛 해등촌면 지역은 현재 도봉구에 속하게 되었다.

[경제와 산업]

해등촌면에만 해당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양주목에 대해 땅이 기름지다고 하였던 것을 보면, 조선 초 해등촌면의 주요 산업 또한 농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교통의 요충지인 해등촌면의 지정학적 위치가 주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경기도 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이자 한성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관장하였으며, 양주목 해등촌면은 그중에서도 수도 한성에서 북동쪽으로 향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앞서 살펴본 『세종실록지리지』 역원조의 기록에서는 해촌과 덕해원을 같이 소개하였던바, 이는 당시에도 해등촌면 지역이 동북 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에 따라 요충지에 위치한 해등촌면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는데, 『여지도서』에서는 양주목에 대해 농업을 일삼는다면서도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기 때문에 장사와 수공업도 즐겨 종사한다고 하였다.

특히 해등촌면에 위치하였던 누원점은 조선 후기 도성과 연결된 상업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는데,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사상 도고(私商都賈)들이 이곳 누원점으로 모여들었으며, 원산·철원 및 서울의 이현·칠패·경강 상인들과 연결되어 도성의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성 내 시전(市廛)의 금난전권(禁亂廛權) 범위 밖에 위치하면서도 도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특징이 누원점 발달의 한 요인이었다.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양주목은 백성들이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며 이권을 독점하여 지방관들이 다스리기 어려워하는 지역으로 꼽히기도 하였는데, 이는 농업을 근본으로 한 조선시대에 지정학적 위치를 무기로 하여 상업이 발달한 양주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문화]

양주에는 도봉 서원(道峰書院), 석실 서원(石室書院) 등 사림의 상징적인 서원들이 위치하여 조선 후기 학문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특히 해등촌면 영국리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에 건립되어 기묘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여 사액을 받았을 정도로 사림 세력에게는 상징적인 장소이었다.

이 지역이 수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관할하였던 만큼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는 도봉 서원이 왜병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어 이후 16년간 폐교되기도 하였다. 도봉 서원은 1608년(선조 41)에 사우와 서원을 다시 세우면서 재건되었는데, 이후 서원의 모습은 조선 전기와는 크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1696년(숙종 22)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이 병향(竝享)되었을 때,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소론의 반대로 출향되었던 송시열은 결국 노론의 정치력이 강화되면서 다시 배향되었으며, 1775년(영조 51)에는 영조도봉 서원에 친필로 쓴 현판을 사액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봉 서원이 위치한 도봉 계곡 근처에는 당대의 유력자들이 방문하여 바위에 글씨를 새기곤 하였으며, 정조는 능행 후 환궁하는 도중 도봉 서원을 지날 때 승지를 통해 치제문(致祭文)을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도봉 서원이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명확히 보여 준다.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은 조선 후기의 사상적·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왕릉이 다수 소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주 지역은 산세가 뛰어나 풍수상의 명당지로 손꼽혔으며, 18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산송(山訟)이 증가하면서 양주 지역에도 묏자리와 관련된 갈등이 일어났다. 그 일례가 1805년의 산송 사건으로, 충청남도 공주에 사는 유학 이규가 미아리와 해등촌면에 소재한 선조(先祖)의 묘역에 투장한 다른 묘들을 옮기도록 할 것을 국왕 정조에게 상언한 것이었다. 정조는 이를 해당 묘가 위치한 관청에서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정조 탕평 정치의 한 방편으로 평가되는 상언·격쟁, 조선 후기 친족 제도의 변화와 산송 등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양주목 해등촌면을 무대로 중첩되어 펼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 인식]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현재의 도봉구 지역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도봉산은 도성에 이르는 산의 주맥(主脈)으로 상징성을 가진 곳이었기 때문에 명종 대에는 도봉산을 대상으로 송목 금벌(松木禁伐)의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으며, 왕의 강무(講武)가 자주 열린 곳이자 교통의 요충지로 중요성이 인식된바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가지는 국가적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였다. 양주목 해등촌면의 경제적 성장 또한 조선 후기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도봉 서원 같은 사림의 상징적 시설이 위치해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해 역대 왕의 능묘가 다수 양주에 조성된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영조정조는 잦은 능행을 통해 국왕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백성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였는데, 능행이 증가하면서 국왕의 행차가 양주를 자주 거쳤으며 그때마다 국왕은 양주 지역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일례로 1792년(정조 16) 9월 정조는 양주에 있는 세조(世祖)의 능인 광릉(光陵)으로 행행(行幸)하여 양주와 포천 백성들에게 향곡(餉穀)과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을 견감(蠲減)시켜 주는 등의 은혜를 베풀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양주목 해등촌면은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선왕들의 능묘가 다수 조성되고 주요 서원이 자리 잡음에 따라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이 주목되었다. 이는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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