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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30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3일 - 고종 장례식 참석 차 전 국민이 서울로 집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3일 - 개성 시위를 시작으로 지방 시위 개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시위 발발하여 양주군 전역으로 확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에서 3·1운동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에서 3·1운동 종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3·1운동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3·1운동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연표보기 - 경기도 양주군의 시위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3·1운동 - 서울특별시 도봉구
종결 장소 3·1운동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만세 운동

[정의]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와 창동리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후 군대와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항일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 사회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헌병 경찰은 정식 법 절차 없이 벌금, 구류 및 태형을 실시할 수 있는 즉결 처분권을 가지고 조선인들에게 전근대적인 태형을 실시하였다. 또 일반 관리와 학교 교원에 이르기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니게 하는 위협적인 식민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무단 통치에도 불구하고 항일 운동은 계속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예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강화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 W.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피지배 민족[식민지나 점령 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의 사상으로, 이것은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 수많은 약소민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식민지에 처했던 우리 민족도 많은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과]

국외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 장덕수 등을 파견하였고, 1919년 2월 만주,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 38명의 연서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무오 독립 선언]. 곧이어 일본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월 8일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을 크게 고무시켰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세력을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등 종교 단체 인사 33인이 고종 황제의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민족 대표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곧 이들과 합류를 하여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시민들도 곧 합세하여 수만의 군중들이 만세 시위를 함께 하였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전국에서 고종의 장례를 위해 50만 명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3·1운동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울의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가 지방에 파급되어 영향을 미쳤고, 이에 호응한 지방 시위가 3월 3일 개성 시위를 시작으로 해서 인천, 양평, 안성, 양주 등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3월 18일을 전환점으로 시위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시위 지역이 전국화 되고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시위운동이 일본 식민지 지방 통치에 전면적인 도전을 가하는 본격적인 ‘독립 전쟁’ 같은 양상으로 곳곳에서 나타났다. 시위대는 무력 탄압을 가하는 일제 관헌을 추적 처단하거나, 일본의 관공서에 쇄도하여 파괴 또는 방화하는 등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양상을 나타났다.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경기도 일반 군들에 비해 이른 시점인 1919년 3월 13일부터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3월 31일까지 이어졌다. 그중 도봉구 지역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는 창동리와 도봉리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도봉리에서는 3월 26일 약 400명의 군중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일으켰는데, 곧 헌병 등이 나타나 이들을 해산시켰다. 3월 29일에는 창동리에서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일으켰고, 역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동자 이하 92명을 검거하고 해산시켰다.

[결과]

3월 하순부터 전국의 시위운동이 과격화되고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거세어지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도봉리와 창동리에서는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사태가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육군성의 기록에 따르면 도봉리의 시위운동은 헌병이 군중을 해산시켰다는 것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어 헌병에 의한 검거나 피살 사태 등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동리에서는 대량 검거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추가적인 언급이 없어 더 이상 시위운동이 진전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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