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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48
한자 -燕山君墓石望柱-長明燈
이칭/별칭 서울 연산군 묘 망주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은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10월 25일 - 서울 연산군 묘 사적 제362호 지정
현 소재지 서울 연산군묘 석망주와 장명등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N37°39′ 46.4245″ E127° 01′ 07.6411″)지도보기
원소재지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와 장명등 원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성격 유적지|능묘 석물
크기(높이) 석망주 218.5㎝[동쪽], 218.4㎝[서쪽]|장명등 189.6㎝[동쪽], 196.5㎝[서쪽]
소유자 국유
관리자 정릉 관리소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과 배위 거창 군부인 신씨 묘의 석망주와 장명등.

[개설]

사적 제362호인 서울 연산군 묘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배위(配位) 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의 묘로, 석망주(石望柱)는 능묘 봉분 앞단 좌우에 배치하는 팔각 기둥형의 석물이다.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燕山君墓石望柱)는 한 쌍을 상계(上階)의 양 끝단에 각각 배치하였다. 장명등(長明燈)은 봉분 정면에서 묘역을 밝히는 석등(石燈)으로, 연산군 묘 장명등은 하계(下階)에 위치하고 있으며 각 봉분 앞에 한 쌍으로 조성되었다. 이 시기 왕릉은 팔각 장명등이 대부분인데, 서울 연산군 묘 장명등은 대군의 격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사각 형태이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건립 경위]

연산군 묘의 초장지(初葬地)는 1506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조성하였지만, 1513년(중종 11) 현재 위치에 대군의 예로 이장하였고, 1537년(중종 32) 거창 군부인 묘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다른 연산군 묘 석물들과 같이 석망주와 장명등도 1513년과 1537년 사이에 이장 및 거창 군부인 묘소를 조성하는 절차를 거치는 동안 건립하였다고 여겨진다.

[위치]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와 장명등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서울 연산군 묘의 경내에 위치하여 있다. 석망주는 묘역 상계의 끝단에 위치하여 있고, 장명등은 그 아래 하계에 좌우로 위치하고 있다.

[형태]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는 팔각기둥 형태로 한 쌍이다. 주신(柱身)[기둥 몸체]과 대석(臺石)으로 크게 구분되며, 각각 별도의 부재로 끼워 맞추었다. 원수(圓首)는 끝이 뾰족한 연봉 형태이고, 운두(雲頭)에는 여의두 무늬를 양각하였으며 염의(簾衣)에는 연주문을 양각하고 그 아래로는 장방형의 긴 면석을 양각하였다. 주신은 매우 가늘고 긴데, 귀[耳]를 조성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이에 비해 대석은 넓게 조성하여 가늘고 긴 주신을 안정화시키고 있다. 대석의 윗부분에는 복련(覆蓮)을 조각하였고, 각 팔면에는 장방형의 면석을 구획하였다. 2m 이상의 높은 규모와 단순한 문양 구성이지만 안정된 구조를 지닌 석망주이다. 동쪽 석망주는 65.7×65.2×218.5㎝, 서쪽 석망주는 62.8×61.6×218.4㎝ 규모이다.

서울 연산군 묘 장명등은 사각 형태로 한 쌍으로 구성되었다. 동쪽의 장명등은 거창 군부인 봉분 앞에 위치하여 있다. 개석(蓋石)은 체석(體石) 위에 별도의 부재로 조성하여 얹었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개석 상단에는 연꽃 봉우리형의 원수와 연잎을 양각하였다. 화사석(火舍石)[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등불을 밝히는 부분]에는 정방형의 화창(火窓)을 네 면마다 뚫었으며, 한 단의 턱을 주었다.

대석에는 안상문(眼象紋)과 복련,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양각하였다. 안상문 안에는 아무 무늬도 넣지 않았고, 상대석과 하대석의 문양 배치가 상하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서쪽 장명등은 규모와 양식이 거의 유사하다. 화사석과 대석의 폭이 거의 같고 개석의 지붕이 작지만 비례가 잘 맞고 단정하다. 동쪽 장명등은 83.7×83.3×189.6㎝, 서쪽 장명등은 81.9×83×196.5㎝ 규모이다.

[현황]

16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다만 다른 석물과 같이 오랜 세월과 풍화로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고, 검은 지의류(地衣類) 등의 이물질이 생성되어 짙은 회색으로 변하였다. 특히 석망주가 매우 심하게 마모되었으며, 서쪽 장명등도 색이 변하고 석질이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와 장명등은 다른 석물과 같이 조성 연대가 뚜렷하고, 왕실에서 예장을 한 사례로 능묘 석물의 기준 작품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석물이다. 서울 연산군 묘 석망주는 상계에 위치하여 있는데, 후대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묘에서는 위치가 하계로 변한다. 아울러 정갈한 조각 수법, 안정된 구조는 대군의 격식에 따른 16세기 묘 장명등과 석망주의 전형을 보여 준다. 특히 장명등의 개석에서 팔작지붕 형태의 삼각형 합각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16세기 초반에 왕릉보다 묘에서 먼저 등장하는 형식으로 기준작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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