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68
한자 英祖
이칭/별칭 광숙(光叔),양성헌(養性軒),이금(李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영조 생
활동 시기/일시 1699년 - 영조 연잉군에 책봉
혼인 시기/일시 1704년 - 영조 정성 왕후 서씨와 혼인
혼인 시기/일시 1759년 - 영조 정순 왕후 김씨와 혼인
몰년 시기/일시 1776년연표보기 - 영조 졸
묘소|단소 원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사당|배향지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
성격
성별
본관 전주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도봉 서원과 관련된 조선 후기의 왕.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의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제20대 왕 경종의 동생이며, 제22대 왕 정조의 할아버지이다. 1704년(숙종 30)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혼인하였다. 1757년 정성 왕후가 죽자 1759년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 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 정비(正妃) 소생의 자식은 없으며, 후궁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에게서 효장 세자(孝章世子), 영빈 이씨(暎嬪李氏)에게서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얻었으나 모두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다.

[활동 사항]

영조는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하여지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숙종의 비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등에 업은 노론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과의 갈등 사이에서 연잉군의 왕세제로서의 입지는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둘러싸고도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1721년 신축 옥사와 이듬해의 임인 옥사를 통해 소론은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역모죄로 대거 처형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연잉군 또한 노론 측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그 지위가 매우 위태하였으나, 인원 왕후의 옹호로 무사할 수 있었고, 결국 1724년 경종이 죽자 조선의 제21대 왕이 되었다.

즉위한 후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기존과 같이 환국을 통해 집권 붕당을 교체하는 방식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각 붕당의 준론계(峻論係) 인물들을 축출하고 완론계(緩論係)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특히 인사 정책으로 쌍거 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여 붕당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728년에는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 측이 주동이 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고, 1755년에는 나주 괘서 사건을 겪는 등, 탕평책에 대한 반발도 계속 이어졌다.

1749년부터 아들 장헌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헌 세자는 소론과 상당 부분 공조를 취하여 노론 측의 공격을 받았으며, 거기에 영조와의 갈등이 더해져 1762년 결국 뒤주 속에 갇혀 비극적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영조는 또한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는 등 정치 제도를 개혁하려 하였으며, 경제 개혁에도 힘써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과 관련된 폐단을 없애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조는 친히 홍화문에 나가 오부 방민(五部坊民)을 만나 여론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위 기간 중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고, 신문고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등을 활발하게 이용하여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편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군사 무기 개발 및 성곽 구축 등 국방 정책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화 정책에 있어서도 영조는 학문을 장려하고 각종 서책을 간행하도록 하여, 정조 시대 문화 부흥의 발판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영조의 정책은 군사(君師) 이념의 주창으로도 이어진다. 또한 영조는 다수의 서원에 사액(賜額)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선현을 존중하는 뜻을 드러냈다. 1775년(영조 51)에는 도봉 서원에 친필로 쓴 현판을 사액하기도 하였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 조광조(趙光祖)가 배향되고 이듬해 사액을 받았던 곳으로 사림 정치를 상징하는 중요한 서원이며, 1696년(숙종 22) 송시열(宋時烈)이 논란 끝에 배향과 출향(黜享), 다시 배향된 노론 학맥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비록 재위 말이기는 하지만 영조도봉 서원에 대한 사액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술 및 작품]

영조는 학술 활동에 힘써, 단일 문집으로 편찬되지는 않았지만 『열성 어제(列聖御製)』 중 「영종 어제(英宗御製)」, 『영종 어제 속편(英宗御製續編)』, 『어제 집경당 편집(御製集慶堂編輯)』, 『어제 속 집경당 편집(御製續集慶堂編輯)』 등 상당한 분량의 어제서(御製書)를 남겼다.

[묘소]

영조와 계비 정순 왕후의 무덤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영조정성 왕후를 위해 현재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 자리를 정하면서 자신 또한 차후 이곳에 묻히고자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 정조가 홍릉 자리를 버려두고 동구릉 내 원릉으로 능지를 정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왕릉을 에워싸고 있다. 병풍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그 외 혼유석·망주석·석양(石羊)·석호(石虎)·문인석·석마(石馬)·장명등·무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