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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06
한자 金昌協
이칭/별칭 동음거사(洞陰居士),한벽주인(寒碧主人),삼주(三洲),농암(農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1년연표보기 - 김창협 생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김창협 식년 진사시 4등 33위 합격
몰년 시기/일시 1708년연표보기 - 김창협 졸
추모 시기/일시 1711년 - 김창협 녹동 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11년 - 김창협 숙종 묘정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13년 - 김창협 석실 서원 배향
출생지 김창협 출생지 - 경기도 과천시
거주|이주지 김창협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외가|처가 김창협 외가 - 경기도 과천시
부임|활동지 김창협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창협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사당|배향지 석실 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사당|배향지 녹동 서원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홍문관 대제학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 시를 남긴 유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증조할아버지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는 김광찬(金光燦)이며, 아버지는 김수항(金壽恒)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과 그 형제들인 김창집(金昌集),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은 ‘6창(六昌)’이라 불리며 조선 후기 문단을 주도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나성두(羅星斗)이고 장인은 이단상(李端相)이다. 김창협의 집안은 16세기 중반 이후 서울 장동(壯洞)[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효자동·창성동에 걸쳐 있던 마을] 일대에 세거하면서 서인 노론(老論)계의 중심 세력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 정치·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활동 사항]

김창협은 1680년(숙종 6) 증광시에 장원하여 관로에 들어서기 전 아버지 김수항과 백부 김수증(金壽增), 형제들과 함께 북한산·월출산·용문산 등 각지의 명소를 유람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관로에 들어서서는 이조 좌랑,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나, 노론의 중심 세력이던 아버지가 유배와 해배를 반복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사되자 영풍[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에 은거하였다. 이후 갑술환국으로 아버지가 신원되자 다시 대사간, 대사성, 예조참판, 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현종·숙종 연간으로 예송과 환국 등의 사건으로 정국 변동이 잦았는데, 김창협의 집안은 노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격심한 정치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때마다 그는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으며 은거와 유람을 즐기며 유명한 시와 기행문 등을 많이 남겼는데, 선영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석실 서원(石室書院)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백운산의 농암 서실 등이 그곳이다.

도봉 서원 또한 김창협이 1697년(숙종 23) 윤3월, 1698년(숙종 24) 10월 두 차례 그의 문하생과 함께 다녀간 곳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는 사흘 동안 묵었으며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차례로 술을 돌리는 예를 행하고 운을 나누어 시를 지어 읊었으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사우(祠宇)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암집(農巖集)』 부록의 「어록(語錄)」에 따르면, 이때 김시좌(金時佐)김시습이 불가에 귀의하였던 사람이므로 여러 문생과 함께 사우를 방문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말하자, “그가 머리를 깎고 모습을 바꾸었다고 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그대는 한유(韓愈)의 글에서 ‘묵가의 이름에 선비의 행실[墨名儒行]’이라는 말을 읽지 못하였는가? 이 사람이 비록 자취는 불문(佛門)에 부쳤으나 뜻은 명교(名敎)에 있었기에 수립한 바가 탁월하였으니 어찌 배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도봉 서원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김창협이 이렇게 도봉 서원을 찾은 이유는 그가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 공부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농암집』에는 도봉 서원에서 같이 수학하였던 홍천 진사 남궁원(南宮垣)을 우연히 만나 그에게 지어 준 시도 들어 있다.

[학문과 저술]

김창협은 집안이 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인 만큼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송시열의 촉탁으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상수와 박학(博學)을 중시하는 서울 지역의 학문적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받아 낙론계 학풍의 시초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성기(趙聖期)와의 교유가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김창협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이이황(李滉)의 설을 절충해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김창협은 주자(朱子)의 학설을 굳건히 지키는 데에는 한 치의 양보가 없어서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을 극력 비판하였다. 저서로 문집인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11년(숙종 37)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같은 해 영암의 녹동 서원(鹿洞書院), 2년 뒤인 1713년(숙종 39) 남양주의 석실 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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