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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40
한자 趙顯命
이칭/별칭 치회(稚晦),귀록(歸鹿),녹옹(鹿翁),충효(忠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조현명 생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조현명 증광시 문과 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52년연표보기 - 조현명 졸
거주|이주지 조현명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묘소|단소 조현명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豊壤)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해등촌면에 거주하였던 문신.

[개설]

조현명(趙顯命)[1690~1752]은 영조의 탕평책을 따른 대표적인 소론 완론(緩論) 계열의 문신으로 해등촌면[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거주하였다.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조인수(趙仁壽)이며,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현명은 1713년(숙종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숙종 45)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721년(경종 1) 이후 연잉군(延礽君)[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연잉군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1722년(경종 2)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양주 해촌[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삼년상을 지냈다. 1724년(경종 4) 김일경(金日鏡)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을 일으켜 연잉군을 난처하게 하자 조현명김일경의 토죄(討罪)를 발의하고자 하였으나 상중(喪中)이라 올리지 못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후 용강 현령, 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3등 공신에 녹훈되어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이후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730년(영조 6)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32년(영조 8) 경상도 관찰사에서 파직된 후 셋째 형 조문명의 병환 소식을 듣고 해촌(海村)으로 갔다. 1733년(영조 9)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1734년(영조 10) 공조 참판에 제수된 이후 어영대장, 홍문관 부제학 등이 되었는데, 1736년(영조 12) 이조 판서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해촌으로 돌아갔으나 엄한 교지를 받고 다시 나아갔다. 이후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다.

1740년(영조 16) 경신 처분으로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頥命)의 관작이 회복되고, 조현명은 공조 판서,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이성해(李聖海)의 소척(疏斥)을 받아 잠시 해촌으로 물러갔다. 이후 우의정,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양역(良役)과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자료로 1748년(영조 24) 『양역실총(良役實總)』를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영조 26) 영의정에 올랐고, 이 해 10월 뇌변(雷變)이 있자 경계하는 차자를 올렸다가 엄한 하교를 받자 해촌으로 물러나 양주옥(楊洲獄)에서 명을 기다리고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1751년(영조 27) 좌의정이 되어 균역법에 관해 차자를 올렸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귀록집(歸鹿集)』이라는 제목의 문집이 남아 있으며, 1755년(영조 31)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인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한다.

[묘소]

사망한 이후 해등촌면에 장사지냈으나 1791년(정조 15) 남포 성주산[현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영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효행을 기려 정려(旌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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