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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70
한자 兪拓基
이칭/별칭 전보(展甫),지수재(知守齋),문익(文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유척기 생
활동 시기/일시 1714년 - 유척기 증광 문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67년연표보기 - 유척기 졸
추모 시기/일시 1767년 - 유척기 문익(文翼) 시호 받음
출생지 유척기 출생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유척기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유배|이배지 유척기 유배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망지 유척기 사망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기계(杞溪)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역임한 유철(兪㯙)이며, 아버지는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자 이조판서에 추증된 유명악(兪命岳)이다.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인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부인은 신사원(申思遠)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슬하에 유언흠(兪彥欽)·유언현(兪彥鉉)·유언진(兪彥鉁)·유언수(兪彥銖)를 낳았다.

[활동 사항]

유척기(兪拓基)[1691~1767]는 노론 계열의 김창즙(金昌緝)신임(申銋)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16세가 되던 해인 1706년(숙종 32) 스승 신임의 손녀를 배필로 맞이하였으며, 8년 뒤인 1714년(숙종 40) 증광시에 응시하여 병과 12위로 등제하였다. 이후 검열·이조정랑·사간을 역임하다가 1722년(경종 2) 신임사화(申壬士禍)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재집권하자 1725년(영조 1) 유배에서 풀려 이조참의·승지를 지내고 1728년(영조 4)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양주 목사 시절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는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며 영조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중용되어 우의정·영의정에 제수되었고 만년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영조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염려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척기김창즙신임의 문하에서 노론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출사한 이후 노론 준론의 대변자로 활동하며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다. 한편, 유척기는 조선 후기의 명필가(名筆家)이자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글씨로 「신라 시조 왕비(新羅始祖王碑)」와 「만동묘비(萬東廟碑)」가 남아 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知守齋集)』 15권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유척기가 사망하자 영조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시장(諡狀)이 채 올라오기도 전에 신료들에게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여, 곧바로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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