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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73
한자 尹汲
이칭/별칭 경유(景孺),근암(近庵),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7년연표보기 - 윤급 생
활동 시기/일시 1725년 - 윤급 진사시 장원, 정시 을과 1위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70년연표보기 - 윤급 졸
부임|활동지 윤급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해평(海平)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유(景孺), 호는 근암(近庵).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 윤계(尹堦)는 황해도 관찰사, 한성 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송시열(宋時烈)의 당으로 몰려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시호는 익정(翼正)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윤세수(尹世綏)로, 윤급(尹汲)[1697~1770]은 다섯 아들 중 넷째이다.

[활동 사항]

윤급은 1725년(영조 1)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시권(試券)을 비봉(祕封)할 때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아 탈락할 처지에 놓였다가 구제되었다. 정언·지평·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737년(영조 13)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였다. 1741년(영조 17)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나, 당시 유생들이 사원(祠院) 훼철에 반대하여 농성을 벌인 것으로 인해 체직되기도 하였다. 1744년(영조 20) 이조참의로 재직 중 인사 행정을 잘못하여 일신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45년(영조 21) 3월 2일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12월 20일 다시 형조 참의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양주 목사로 재직할 당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749년(영조 25)에는 인사에 반대하다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763년(영조 39) 이조판서로 재직 시 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 신광집(申光輯)의 초사(初仕)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서용되었다. 이후 판의금부사, 한성 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노론 준론(峻論) 계열에 속한 인물로서 영조의 탕평책과 인사 정책에 반대하여 여러 번 파직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서용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의 문인으로 노론 계열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였다. 저서로는 개인 문집인 『근암집(近庵集)』과 1746년(영조 22)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저술한 『근암연행일기(近庵燕行日記)』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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