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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0
한자 鄭麟趾
이칭/별칭 백저(伯雎),학역재(學易齋),문성(文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양혜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96년연표보기 - 정인지 생
활동 시기/일시 1414년 - 정인지 문과 급제, 예빈시 주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78년연표보기 - 정인지 졸
부임|활동지 정인지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묘소|단소 정인지 묘소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하동
대표 관직 영의정 부사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양효공 안맹담의 신도비문을 찬한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정인지(鄭麟趾)[1396~1478]는 태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성종 대까지 활동하였다. 유학(儒學)과 전고(典故)에 밝아 역사, 천문, 역법(曆法), 아악(雅樂)을 정리하였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도 기여하는 등 조선 전기 대표적 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증조할아버지는 정익(鄭翊)이고, 할아버지는 정을귀(鄭乙貴)이며, 아버지는 석성 현감을 지내고 영의정 부사에 추증된 정흥인(鄭興仁)이다.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부인은 조후(趙侯)의 딸이며, 후처는 문하 좌정승을 지낸 이성중의 손녀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아들은 정광조(鄭光祖)·정현조(鄭顯祖)·정숭조(鄭崇祖)·정경조(鄭敬祖)·정상조(鄭尙祖)이다. 정광조는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맏딸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정인지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후, 1414년(태종 1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주부를 제수 받았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에는 병조좌랑을, 1421년(세종 3)에는 “대임을 맡길 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는 태종의 뜻에 따라 병조정랑에 올랐다. 세종 대에도 왕의 신임을 받아 이조·예조의 정랑, 집현전 관원에 뽑혔다.

1427년(세종 9)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다시 직제학으로 승진하고 1430년(세종 12)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후 인수 부윤(仁壽府尹), 예문관 제학, 이조 좌참판, 충청도 관찰사, 집현전 제학, 형조참판, 형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실시하는 데에 공로가 있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전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세종의 뜻에 따라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힘을 기울여 훈민정음의 서문을 찬진하기도 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성공과 함께 정난에 협찬한 공로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면서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 부사에 승진되고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1471년(성종 2)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431년(세종 13)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42년(세종 24)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고, 1445년(세종 27)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1447년(세종 29)에는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太祖實錄)』 증수에 참여하였으며, 1451년(문종 1)에는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하고 다음 해에 다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1452년(문종 2)부터 1454년(단종 2)에 걸쳐 편찬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총 감수하기도 하였다. 개인 저서로는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으며, 사돈인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신도비문을 찬하였는데, 그 신도비가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번지에 있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는데, 부인의 묘도 함께 있다. 묘역이 충청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2.22 [활동사항] 수정 <변경 전>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 /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 <변경 후>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 /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
이용자 의견
신* 정난 1등, 좌익 2등, 익대 3등, 좌리 2등공신의 호를 받았습니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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