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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5
한자 李植
이칭/별칭 여고(汝固),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4년 10월 11일연표보기 - 이식 생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이식 식년 생원시 3등, 별시 병과 4위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47년 6월 11일연표보기 - 이식 졸
추모 시기/일시 1686년 - 이식 영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94년 - 이식 문정(文靖)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08년 - 이식 여주 기천 서원(沂川書院)에 배향
거주|이주지 택풍당(澤風堂)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314
묘소|단소 이식 묘소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사당|배향지 기천 서원 -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덕수(德水)
대표 관직 대사간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과 관련한 글을 쓴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이안성(李安性)이다. 부인은 대사헌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손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식(李植)[1584~1647]은 한성(漢城) 남수문(南水門) 조암동(槽巖洞)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체질과 임진왜란 때문에 12세가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이안눌(李安訥)정철(鄭澈) 등에게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식년 생원시 3등으로 급제하고, 또 같은 해 별시 문과 병과에 4위로 급제한 후 1613년(광해군 5) 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었으나 처남인 심정세(沈挺世)가 그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자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지만,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광해군이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간·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개수(改修)를 주관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갔으며,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봉성(鳳城)으로 끌려갔다가 의주로 가서 구금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1646년(인조 24) 예조 판서로 문과 별시의 시험관이 되어 출제하였다가 시제(詩題)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이듬해 택풍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식은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6~17세기 고문(古文) 운동에 앞장서서 같은 시기 활동하였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 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충실하여 『주자 대전(朱子大全)』·『주자 어류(朱子語類)』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으며, 불교·노장 사상 등을 이단으로 철저히 배격하였다. 또한 이이(李珥)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이이의 문묘(文廟) 종사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저서로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송시열이 1674년(현종 15) 편찬하고 간행한 『택당집(澤堂集)』이 전한다. 도봉 서원과 관련하여 『택당집』 14권에 ‘안진사(安進士)와 구수재(具秀才) 두 생질과 아들 면(冕)이 도봉 서원에 들어가서 글을 읽으려 할 즈음에 적어 준 글’이 실려 있다. 1636년(인조 14) 정월 5일 써 준 이 글에서 이식은 큰아들 이면하(李冕夏)와 두 생질에게 도봉 서원으로 가서 학업에 힘쓸 것을 권유하였음을 밝히고, 구체적인 학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백아곡(白雅谷)에 있다. 이식이 살았던 택풍당에서 동쪽으로 약 180m 떨어진 야산 기슭이다.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50년(효종 즉위) 삭탈당한 관직이 복구되고 1686년(숙종 1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94년(숙종 20)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고, 1708년(숙종 34) 여주(驪州)의 기천 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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