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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7
한자 閔以升
이칭/별칭 성재(誠齋),언휘(彦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 9월 4일연표보기 - 민이승 생
몰년 시기/일시 1697년 12월 4일연표보기 - 민이승 졸
부임|활동지 민이승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묘소|단소 민이승 묘소 - 경기도 김포시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여흥(驪興)
대표 관직 공조좌랑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서 공부하였던 학자.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 아버지는 진사 민만(閔晩)이고, 어머니는 압해 정씨(押海丁氏)이다. 부인은 충의위(忠義衛) 이제(李濟)의 딸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슬하에 민윤창(閔允昌)·민경창(閔景昌)·민회창(閔會昌) 등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민이승(閔以升)[1653~1697]은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통독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후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박세채(朴世采)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도봉 서원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1682년(숙종 8) 대신들의 천거로 창릉(昌陵)과 영릉(英陵)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뒤에 효릉 참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다.

1688년(숙종 14)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극렬히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두 차례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잠깐 영평 현령을 지냈다. 1696년(숙종 22) 정제두(鄭齊斗)·김창흡(金昌翕) 등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다. 1697년(숙종 23)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겨울 익위사 익위를 제수 받았다가 곧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민이승은 관직보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유가와 도가 등 제가와 역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모든 경서에 붙여진 주석의 내용을 살펴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는 전해지지 않고 단지 주변 인물과 교류하면서 남긴 편지 글만이 일부 남아 있다. 스승인 윤증박세채를 비롯해 함께 공부하였던 김창협, 정제두(鄭齊斗) 등과 다양한 학문적 주제를 활발히 토론하였다. 특히 양명학(陽明學)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정제두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묘소]

조현명(趙顯命)이 쓴 묘지명에는 부인과 함께 광주(廣州) 사천부간지원(沙川負艮之原)에 합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경기도 의왕시 미륵당 부근이다. 그 후 경기도 김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우의정이던 최석정(崔錫鼎)이 건의하여 나라에서 별도로 부의를 내려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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