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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67
한자 李喬岳
이칭/별칭 백첨(伯瞻),석음와(惜陰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63년 6월 11일연표보기 - 이교악 생
활동 시기/일시 1705년 - 이교악 문과 장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28년 7월 19일연표보기 - 이교악 졸
묘소|단소 이교악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산66-1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
대표 관직 대사헌(大司憲)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과 관련하여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로 용인 이씨(龍仁李氏) 26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영인(李榮仁)이고, 할아버지는 이사익(李士益)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후망(李後望)이다. 어머니는 송담록(宋覃祿)의 딸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장수 황씨(長水黃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다. 딸 하나만 두고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이세준(李世準)을 양자로 삼았다.

[활동 사항]

이교악(李喬岳)은 1663년(현종 4) 6월 11일에 태어났다. 비록 9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었음에도 꾸준히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어릴 적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인연으로 일찍부터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래서 송시열이교악을 위해 「석음와설(惜陰窩說)」이란 글을 지어주기도 했다. 1696년(숙종 22)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사직 참봉(社稷參奉), 공조랑(工曹郞), 순안 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1705년(숙종 31)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 급제하여 주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역임했다. 1710년(숙종 36) 소론 일파의 윤증(尹拯)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이들을 옹호하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 잠시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 이후 여러 외직을 거쳤고 승지(承旨)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720년(숙종 46)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소론(少論)이 득세하던 1723년(경종 3) 김범갑(金范甲)송시열도봉 서원의 원향(院享)에서 철거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교악은 여기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경산(慶山)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경기 감사(京畿監司)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듬해인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폭음(暴飮)하다가 7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석음와 유고(惜陰窩遺稿)』가 전해진다.

[묘소]

이교악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에 있다. 무덤 앞에는 신도비가 서 있다. 족보와 신도비에는 묘소가 행촌(杏村)에 있으며 첫 번째 부인 장수 황씨와 합장했다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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