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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74
한자 李尙吉
이칭/별칭 사우(士祐),동천(東川),만사(晩沙),충숙(忠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6년 12월연표보기 - 이상길 생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이상길 진사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37년 1월연표보기 - 이상길 졸
추모 시기/일시 1642년 - 이상길 충렬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61년 - 이상길 신도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86년 - 이상길 부조(不祧) 시행
묘소|단소 이상길 묘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16-1
사당|배향지 충렬사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벽진
대표 관직 공조판서

[정의]

현재의 도봉구 지역을 관할하였던 양주에 은거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성주].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만사(晩沙). 선조인 이총언(李悤言)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장군으로서 성주에 정착한 이후 대대로 성주(星州)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집안이다. 고조할아버지 이소원(李紹元)은 문과 급제 후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는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을 지낸 이유번(李有蕃)이며, 할아버지는 덕천 군수(德川郡守)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 이희선(李喜善)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는데, 이상길(李尙吉)의 공으로 인해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할아버지는 병조참판에, 부친은 좌찬성(左贊成)에 각각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창원 정씨(昌原丁氏)로서 경상도 도사(道使) 정환(丁煥)의 딸이다. 형은 이상철(李尙哲)이며 아우는 이상적(李尙迪)과 이상학(李尙學)이다. 이상길의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판관(判官)을 지낸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일찍 죽고 남은 아들 이경(李坰)은 과거에 급제하여 참판이 되었다. 이밖에 측실 소생으로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감(李堪)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른 아들은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딸은 생원인 이안방(李安邦)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길은 1556년 12월에 성주(星州)에서 태어났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에 제수되었다가 3년 후 감찰(監察)로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에는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과 관련하여 최영경(崔永慶)의 국문을 주청하였다가 최영경의 도당에 의해 모함을 받아 이듬해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좌랑으로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그 공으로 강원 감사 종사관(江原監司從事官)에 제수되었으며, 이후로 병조정랑, 익산 군수(益山郡守), 겸예빈 부정(兼禮賓副正)을 거쳤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가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광주 부윤(光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이라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602년(선조 35)에 조정에서 최영경의 일이 다시 논의되면서 풍천(豊川)으로 유배되었다. 6년 후에 사면되어 회양 부사(淮陽府使), 안주 목사(安州牧使),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쳤다. 그러나 1615년에 또다시 최영경의 일이 거론되면서 파직되었다. 이에 이상길은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머물렀는데, 도성 안으로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으며, 당시의 집권 세력과는 야합하지 않고 곧은 뜻을 지켰다.

1621년(광해군 13)에 용천 부사(龍川府使)가 되자마자 청나라 군사가 대거 몰려오자 이상길은 청군에 맞서 성을 끝까지 지켰으며, 이에 용천의 백성들이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23년 인조(仁祖)의 반정(反正) 후 동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잇따라 제수되고 청나라 사신을 맞기 위해 접반사(接伴使)로 차임되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역적을 토멸한 공이 있다 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에 봉해졌다. 이후로도 평안도 관찰사, 호조참판, 전주 부윤(全州府尹), 병조참판, 대사간과 대사헌 등 주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나이 80세에는 특별히 자헌대부가 가자(加資)되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참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정월에 요새가 함락되자,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망하였는데 어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나는 성중(城中)으로 달려가서 여러 재신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빈 창고로 들어가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인 『동천집(東川集)』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길의 9세손 이두화(李斗和)와 10세손 이상서(李尙書) 등이 유고를 수집하여 1911년에 간행한 것으로, 소(疏)·논(論)·표(表) 등은 탁월한 치세가(治世家)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주며, 특히 권3의 「천조 일기(朝天日記)」는 연행 기록으로서 좋은 자료가 된다.

[묘소]

기록에는 이상길이 자결하자 청군이 뒤쫓아 와 활을 쏘았는데, 아들 이경이 그 시신을 찾아 돌아왔으며, 그 해 4월에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 서쪽 기슭에 있는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당시의 양주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일대로서,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문인석 등을 갖추고 있다. 본래 이상길의 신도비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가 2008년 10월 30일 충숙 이공 신도비에서 충숙공 이상길 묘역으로 문화재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70호].

[상훈과 추모]

1642년(인조 20) 강화군 선원면에 충렬사(忠烈祠)가 건립되어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이시직(李時稷)·심현(沈誢) 등과 더불어 재향되었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로 추증되었다.

1661년(현종 2)에는 묘소 앞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아들 이경의 부탁으로 당시 의정부 우찬성 겸 성균관 제주(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로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짓고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제주(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을 썼다. 현재는 비각을 세워서 보존하고 있다. 또한 1786년(정조 10)에는 후손 이해보(李海普)의 청에 의하여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송시영(宋時榮) 등의 전례에 따라 이상길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아우는 이상적(李尙迪)과 이상학(李尙學)이다--->아우는 이상적(李尙迪)과 이상급(李尙伋)이다.
  •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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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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