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00
한자 忠奴金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508년 - 충노 김동 문려(門閭)건립
추모 시기/일시 1511년 - 충노 김동 정문 건립
묘소 충노 김동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지도보기
성격 노비
성별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노비.

[개설]

김동(金同)은 강녕 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의 노비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자세한 가계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기세종의 아들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손자로서 작위를 물려받아 부정이 되었는데, 후에 당파에 붙어 정사를 관여했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채 생애를 마쳤다. 이후 이기영조 때 도정(都正)에 추증되고 정조 때에 군(君)에 추증되었으며,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받았다.

[활동 사항]

연산군이 재위에 있을 때에 흥청(興淸)에 소속되었던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가 권세를 믿고 이기의 집을 빼앗았다. 다시 이기의 소실(小室)을 빼앗고자 하여 이기가 종을 시켜서 자신을 욕한다고 거짓으로 호소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이기와 그의 종 김동을 잡아 가두고 단근질을 하며 신문하였다. 이때 김동이 자신이 혼자 한 짓일 뿐 주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진술하였는데, 여섯 차례나 고문을 받았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김동은 극형을 받아 죽었지만 주인 이기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묘소]

김동의 묘는 도봉구 도봉동 일원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내에 있다. 영해군의 묘 아래에 증 좌찬성 신윤동(申允童), 임천군 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묘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1면으로 된 묘비가 있는데, 크기는 너비 37㎝, 두께13㎝, 높이 64㎝이고 전면에 ‘고 충노 김동(故忠奴金同)’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 노비의 묘로서 묘비까지 갖추고 있는 극히 드문 예이다.

[상훈과 추모]

1508년(중종 3) 4월 5일에 의노(義奴) 김동을 표창하는 문려(門閭)를 동네 어귀에 세우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3년 후에 다시 명을 내려서 집 앞에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