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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682
한자 洪命憙居住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36나길 4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939년 - 홍명희 서울시 마포 대흥동에서 창동리 역 앞으로 이주
현 소재지 홍명희 거주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136 나길 40[도봉구 창동 820]지도보기
성격 거주지
관련 인물 홍명희(洪命憙)[1888~1968]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에 있는 홍명희가 1939년 말 가족과 함께 5년여 살았던 곳.

[개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조선의 신문학을 일구어 낸 ‘삼재(三才)’로 불렸던 인물이다. 홍명희는 일제 강점기 최고의 역사 소설 『임꺽정』을 쓴 작가이자,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저명한 민족 운동가이었다. 끝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친일의 길로 나아간 이광수, 최남선과 달리 홍명희는 끝까지 ‘고절을 지켜 낸 개결(介潔)한 지사’라는 평을 얻고 있다.

홍명희의 이러한 행동 뒤에는, 1910년 국권 피탈의 수치를 참지 못하고 순국한 금산 군수를 지낸 아버지 홍범식(洪範植)[1871~1910]의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나라를 기어이 되찾으라”는 유언과 1912~1918년 중국 및 싱가포르 등지를 오가며 직접 뛰어들었던 독립운동 체험이 자리하고 있다. 귀국 후에도 3·1 운동으로 1년여, 신간회 관계로 2년여 투옥되는 등 간난신고의 삶을 살았다. 그 와중인 1928년부터 1940년까지 몇 차례 중단하면서도 대작 『임꺽정』을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한국 장편 소설의 수준을 드높였다.

1920년대 초부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관심을 갖고 각종 민족 해방 운동 단체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에도 홍명희는 일관되게 좌우 세력의 분열을 넘는 방안으로 중간파 정치 세력의 결집에 주력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함께 참석하였다가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잔류하였다. 1968년 3월 5일 노환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부수상 등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명희는 일제 강점기 말인 1939년에 솔가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4-1번지로 이주하여 만 5년 가까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1944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강정리 증조할머니 신씨의 후손들 곁으로 옮겨 갈 계획이었으나, 딸들만 보내고 자신은 이주를 결행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립 경위]

일제 강점기 말의 극악한 전시 파시즘 체제는 홍명희처럼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인사들을 친일 활동에 동원하려고 겁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이에 홍명희는 『조선 일보』에 연재하던 『임꺽정』 집필을 중단함과 동시에 일체의 사회 활동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창동으로 은거해 온다. 그러므로 홍명희에게 창동 집은 시대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삭이며 온갖 어려움을 견디는 수도처 같은 곳이었다. 창동에는 신간회 시절 동지이던 변호사 가인(街人)[홍명희도 신문학 초기에 가인(假人·加人)이라는 호를 썼다] 김병로(金炳魯)가 살고 있어, 벽초는 그 인연과 주선으로 창동을 은거지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 창동은 일제의 예봉(銳鋒)을 피하려는 요시찰(要視察) 인물들이 속속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에 일제 경무국에서는 양주 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하고 창동 주재소에 고등계 형사를 상주시켜 홍명희 같은 이들을 감시하였으므로 창동으로 옮겨 왔어도 생활에는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어려운 점은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지인들조차 발걸음을 끊는 일이었다. 어쩌다 지방에서 친척이라도 올라오면 멀건 죽 한 사발을 내놓으면서도 홍명희가 참으로 반가워하였다는 후문이다.

[위치]

홍명희 거주지(洪命憙 居住地)는 당시 주소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4-1번지이며,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136 나길 40 신도 브래뉴 아파트 103동 자리[도봉구 창동 820번지]이다. 창동역을 나와 북쪽으로 향하는 대로변 오른쪽에 있다.

[형태]

대로변에 있는 작은 초가이었다. 집이 너무 옹색하여 매우 놀랐다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딸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옆집에는 영화감독 임선규, 배우 문예봉 부부가 살았다.

[현황]

2003년 9월 재개발되어 현재 신도 브래뉴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03동 자리가 벽초 홍명희의 거주지 옛터다.

[의의와 평가]

창동 시절인 1940년 10월에 홍명희는 잡지 『조광』에 소설 『임꺽정』의 화적편 중에서도 ‘자모산성’ 하 부분을 발표하였다. 이 부분을 창동 시절에 썼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을 끝으로 『임꺽정』 연재는 영구히 중단되고 말았다.

창동 시절 홍명희가 발표한 글은 「호암(湖巖)의 유저(遺著)에 대하여」[『조선 일보』, 1940. 4. 16]가 유일하다. 유학 시절 이래 홍명희의 절친한 벗이었던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의 작고 1주기에 맞추어 유저가 출간된 것을 기념하여 쓴 글이다. 또한 대동 출판사가 간행하려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의 책 『누판고(鏤板考)』의 한문 교열을 맡아 보았다. 대동 출판사는 둘째 아들인 홍기무가 다니던 곳이었다. 장남 홍기문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조광』지에 싣기도 하였다.

비록 창작은 중단하였지만 창동 시절에 일어난 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임꺽정』의 단행본 출간이다. 조선 일보사 출판부가 1939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8권 예정 가운데 모두 4권을 간행하였다. 이로써 대중들이 『임꺽정』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결과로 홍명희는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과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홍명희는 이 시절 이화 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는 쌍둥이 딸들의 논문을 지도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도 하였다. 장녀 홍수경이 「우리 의복 제도 변천에 대한 연구」를, 차녀 홍무경이 「조선 혼인 제도의 역사적 고구(考究)」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제출하였던 데는 그 뒤에 아버지 홍명희가 있었다. 이 논문들은 1948년에 『조선 의복, 혼인 제도의 연구』[을유 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이 분야 연구의 선구가 되었다. 『임꺽정』에서 본 바 있는 우리 옛 풍속에 대한 홍명희의 해박한 지식이 이 모든 과정을 이끌었음은 물론이다.

1942년 3월에는 차남 홍기무정인보의 차녀 정경완과 결혼시키는 경사를 맛보기도 하였다. 홍기무 내외는 창동 정인보의 자택에서 혼례를 올린 후, 괴산에 살고 있던 홍명희 어머니에게 폐백을 드리고 온양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렵던 양가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정인보홍명희가 괴산 및 온양행에 동반하였음을 보여 주는 사진이 남아 있어 두 사람의 우정과 양가 인연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고 있다. 정인보홍명희의 딸들을 가족 이상으로 알뜰하게 대하였다는 점을 밝혀 주는 시조도 여러 수 남아 있어 관련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절의 홍명희와 관련하여 특기하여야 할 것은 그의 입성과 울화에 관한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자들은 국민복에 각반 차림을 하고 여자들은 흔히 ‘몸빼’라는 이름의 일본식 작업복을 입어야 하던 시절에, 홍명희는 “여름이면 고운 모시 적삼에 모시 두루마기를 받쳐 입고 옥색 허리띠, 대님에, 두루마기 아래는 아른아른 녹색 주머니까지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한 연구자는 동네 산책에도 그토록 표 나게 호사를 부린 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조선적인 것’을 말살하려던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조선 정조’의 상징인 한복 정장 차림을 하고 ‘일인 시위’를 한 것이라는 풀이를 한다.

겉으로는 이렇게 태연을 가장하고 있어도 홍명희의 내면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으니, 손자 홍석중은 이 무렵의 홍명희를 두고 “불안한 정국 속에서 늘 좌불안석하시는 초조한 모습이었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시는 집안의 무서운 어른”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니 정작은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는 인간 홍명희의 안간힘이 한복 정장 차림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되짚어 볼 때 홍명희에게 창동 시절은 민족의 영욕을 곱씹어 다음을 준비하게 만든 생의 중요한 계기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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