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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사우상량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06
한자 道峯祠宇上樑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2년 - 「「도봉사우상량문」」 저자 오억령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18년 - 「「도봉사우상량문」」 저자 오억령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662년 - 「「도봉사우상량문」」이 수록된 『만취집』 간행
배경 지역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상량문
작가 오억령

[정의]

조선 후기 오억령도봉 서원의 사우를 두고 지은 상량문.

[개설]

「「도봉사우상량문」(道峯祠宇上樑文)」은 조선 후기의 문신 만취(晚翠) 오억령(吳億齡)[1552~1618]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위패를 모신 도봉 서원의 사우(祠宇)의 상량을 축복하는 글이다. 「도봉사우 상량문」오억령의 시문집 『만취집』 권5에 수록되어 있다.

오억령의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158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조 정랑, 성균관 사성, 대사간, 부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성에서 선조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름]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 윤근수(尹根壽)[1537~1616] 밑에서 명나라와의 마찰을 해소하는데 진력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인목 대비를 폐하는 데 반대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만취집(晚翠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구성]

「「도봉사우상량문」」에서는 우선 도봉 서원 사우에 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했음을 언급하고, 임진왜란 때 훼손된 도봉 서원을 복원한 내력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일반적인 상량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방으로 술을 뿌리며 축원하는 내용이 이어져 있다.

[내용]

도덕이 돌아가는 곳[道德之歸]은 멀든 가깝든 사람들이 모두 우러른다고 하는 말로 시작하여 정암 조광조의 덕을 기렸다. 그러고는 도봉 서원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한 이후로 도봉 서원이 유자(儒者)들이 경모(敬慕)하는 곳이 되었다 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서원의 여러 곳이 훼손되었으나 곧 복원되었으며, 특히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묘우(廟宇)는 예전과 같이 복원되었다 하였다. 이어서 상량식(上梁式)에서 하는 예를 행하고, 사방으로 술을 뿌리며 축원하는 내용이 각각 양동(梁東)→ 양서(梁西)→ 양남(梁南)→ 양북(梁北)→ 양상(梁上)→ 양하(梁下) 등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징]

상량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 이를테면 사방에 술을 뿌리는 상량식의 한 절차를 염두에 두고 방향에 따라 축원하는 내용을 적고 있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도봉 서원에는 조광조와 더불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도봉사우상량문」」을 지을 당시에는 아직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기 전이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는 송시열에 대한 추숭이 지극하게 이루어졌으나, 그 이전에는 조광조가 유림(儒林)에 미친 영향력이 상당하였음을 「도봉사우 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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