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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 사액사제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33
한자 道峯書院賜額賜祭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정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11년 - 「도봉서원 사액사제문」 저자 심승택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도봉서원 사액사제문」 창작
배경 지역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제문
작가 심승택(沈承澤)[1811~?]

[정의]

1839년 심승택이 지은 도봉서원에 사액을 하면서 제사를 지낼 때 쓴 제문.

[개설]

도봉서원(道峯書院)은 1573년(선조 6년)에 조광조(趙光祖)를 기리기 위해서 조광조가 자주 찾았던 도봉산 자락의 영국사(寧國寺) 터에 설립한 서원으로, 설립과 동시에 사액(賜額)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경우 도봉 서원에 머물며 강학을 한 인연으로 1696년(숙종 22)에 병향되었는데, 1723년(경종 3)에 출향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다시 배향되었다. 특히 1759년(영조 35)에는 영조가 손수 ‘도봉서원(道峰書院)’ 네 자를 쓰고 치제문을 불러 주어 치제(致祭)하면서 게판(揭板)[건물의 현판을 걸거나 법령 등을 적은 판(板)을 걸어 널리 알림]하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 35년 10월 2일, 10월 4일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35년 10월 6일 참조]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도봉서원은 훼철되고 조광조송시열의 위패는 땅에 묻혔다. 이후 지방 유림들이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다가 1971년에 사우(祠宇) 3칸과 유도문(由道門)을 신축하였다. 2012년 현재 도봉서원과 각석군 종합 정비 계획에 따라 2014년까지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도봉서원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구성]

「도봉서원 사액사제문(道峯書院 賜額 賜祭文)」은 4언(四言)으로 이루어진 제문이다.

[내용]

「도봉서원 사액사제문」

사람의 행할 길은 대로와 같도다. 주역에는 탄탄하다고 받들었고 홍범(弘範)에는 평평하다고 말하였다. 여러 성인(聖人)들의 어려움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발 디디고 있는 것은 오직 실제의 땅이요 둘러보는 것은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무지개다리가 한번 끊어져 황폐하기 몇 해인가. 이단이 가득하고 간사한 행동이 판을 치도다. 사악함을 물리친 공은 큰 현인(賢人)에 힘입은 바다. 주운을 부르짖으며 막고 맹 씨는 치고 차며 분발했도다. 궤범으로 지도하여 몽매함을 깨쳤도다. 우리나라에 유교(儒敎)가 들어오니 안향정몽주가 이어받아 김굉필정여창에 물려주었다. 조광조송시열이 이어 나가니 조예가 아득하고 멀도다. 덕은 태산교악과 같이 드높았고 학문은 원천에 달하였다. 중종이 재위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 조광조를 등용하여 반열에 뛰어났다. 효종이 등극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다. 송시열을 스승 삼아 춘추를 강론함에 이치의 맞춤은 정밀하고 섬기는 공은 한가지로다. 천고에 뛰어나니 역사도 다 전하지 못하였다.

사악함을 뿌리쳐 도(道)를 지킴은 천년 전보다 더욱 빛나느니. 고려 시대의 풍속은 변하지 않아 도교(道敎)를 되려 존중하여 연판장을 올리고 밤새워 울부짖어 눈물은 마침내 꽃기와가 되었는데, 흉하고 추악한 무리가 성인을 무고하니 경전은 갈갈이 찢기어졌도다.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변론하니 한 손으로 시냇물을 막은 격일세, 요기가 사라진지라 밝은 해는 높이 빛나는구나. 저 대도(大道)가 환히 트이니 우리 백성과 함께 옮겨 가리라. 어찌 이제 나라 안에 사악함이 일어나리요. 전철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맹종한 것을 누가 알겠는가.

나의 큰 스승은 혹 내치를 못하고 변방에 도적이 날뛰거늘 허물을 깨닫도록 가르쳐 주소서. 자주 보시고 두루 행하사 혼미한 사람을 깨닫게 하였네. 앞서 끼친 밝은 광채는 어두운 길[道]을 밝히는도다. 공은 하우씨, 후직과 같고 계통으로는 공자, 안자에 닿았다. 도(道)와 예(禮)가 높기는 산봉우리 우뚝 솟은 나무와 같네. 오랜 벽은 아득히 높고 서늘한 물은 졸졸 흐르는구나. 행위를 밝히는 생각 백세(百世)가 이르도록 제향(祭享)하리니. 유교를 근심하니 광막함이 줄줄이로다. 제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니 흠향하시라.

[道峯書院賜祭文 (憲宗己亥○文正公趙光祖文正公宋時烈幷享○楊州)

人之有道, 若大路然. 易賛坦坦, 範叙平平.

群聖閫域, 由是之焉. 踏惟實地, 覔非別天.

虹橋一斷, 蓁蕪幾年. 異趣充塞, 詖行狂顚.

闢廓之功, 繄賴大賢. 朱捍呌拍, 孟奮踢拳.

軌以指南, 牖彼蒙顓. 爰曁海東, 吾道其邅.

文忠繼開, 敬獻後先. 兩賢嗣武, 造詣微玄.

德隆泰喬, 學窮源泉. 中廟在宥, 至治陶甄.

卿時登庸, 鵠峙班聯. 寧陵嗣服, 國耻未湔.

卿爲賓師, 講說麟編. 契合之密, 事功之專.

卓越千古, 史不勝傳. 閑邪衛道, 尤光于前.

麗俗未變, 醮靑猶虔. 連章呌閽, 漏竟花甎.

凶醜侮聖, 割裂經全. 拚死力辨, 隻手障川.

氛翳旣豁, 日星高懸. 倬彼大道, 偕我民遷.

何今域中, 邪歧傍穿. 覆轍靡悔, 冥埴孰憐.

我忝君師, 敎或有愆. 修不務內, 寇乃闖邊.

疇示周行, 俾迷知悛. 先正遺輝, 昏衢燭燃.

功埓禹稷, 統接尼淵. 道體之尊, 布峯不騫.

古壁巖巖, 寒水涓涓. 景行之思, 百世豆籩.

斯文有憂, 曠感若偏. 伻官致侑, 靈庶歆旃.(知製敎沈承澤製)]

[특징]

「도봉서원 사액사제문」은 4언으로 이루어진 제문으로, 운자는 ‘연(然)’, ‘평(平)’, ‘언(焉)’, ‘천(天)’, ‘연(年)’, ‘전(顚)’, ‘현(賢)’, ‘권(拳)’, ‘전(顓)’, ‘전(邅)’, ‘선(先)’, ‘현(玄)’, ‘천(泉)’, ‘견(甄)’, ‘연(聯)’, ‘전(湔)’, ‘편(編)’, ‘전(專)’, ‘전(傳)’, ‘전(前)’, ‘건(虔)’, ‘전(甎)’, ‘전(全)’, ‘천(川)’, ‘현(懸)’, ‘천(遷)’, ‘천(穿)’, ‘연(憐)’, ‘건(愆)’, ‘변(邊)’, ‘전(悛)’, ‘연(燃)’, ‘연(淵)’, ‘건(騫)’, ‘연(涓)’, ‘변(籩)’, ‘편(偏)’, ‘전(旃)’이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에 대한 사액은 선조 때 건립하면서 바로 내렸으며, 1759년에는 영조가 친필로 현판을 써서 걸게 하였다. 또한 수시로 도봉서원에 서책을 내려 주고 치제하게 하였다. 「도봉서원 사액사제문」은 1839년(헌종 5)에 심승택(沈承澤)[1811~?]이 지어 올린 것으로, 『양주군지』와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남궁원의 「도봉서원 출입 인물과 오늘날 서원이 사회에 끼친 영향」[『도봉서원 복원의 역사적 의의』, 도봉 문화원, 1998]에서는 1775년(영조 51)에 사액을 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소개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는 1775년에 사액하였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전고대방』에 “[도봉서원은] 선조 계유년[1573]에 건립되어 같은 해 사액되었다. 영조 을미년[1775]에 어필 편액을 걸었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영조 을미년 사액’은 이 두 전적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한국 사료 총서 『용호한록(龍湖閒錄)』에도 「양주 도봉서원 치제문(楊州道峯書院致祭文)」이 나오는데 역시 심승택이 제진(製進)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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