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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284
한자 先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선사/선사
집필자 홍승우

[정의]

선사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역사.

[개설]

선사(先史)는 역사(歷史)라는 용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문자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선사 시대라는 개념은 인간이 남긴 물질 자료를 통해 인간 문화를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의 발전과 함께 자리 잡은 것이다. 인류가 발생한 이후 문화 발전 양상은 도구 제작의 원료를 기준으로 시기 구분되는데, 19세기 크리스티안 톰센(Christian Jürgensen Thomsen)이 처음 돌, 청동, 철의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이후 존 러복(John Lubbock)은 석기를 구석기와 신석기로 다시 구분하였는데, 이로써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라는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가 설정되었다. 그런데 이 개념은 역사 시대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시대를 포함한 전체의 단계 설정이다. 역사 시대 이전의 시기라는 의미로 선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51년 대니엘 윌슨(Daniel Wilson)의 저서 『고고학과 스코틀랜드의 선사 시대 연대기[The Archaeology and Prehistoric Annals of Scotland]』부터이다.

한편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중간 단계로 원사 시대[protohistory]를 설정하기도 하는데, 한 문화 집단이 자체의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주변의 선진 문화 집단이 외부의 입장에서 역사 기록을 남겨 놓은 과도기적인 경우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三國) 이전의 역사들이 중국 측 사료에 기술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선사라 함은 엄격히 말하면 문자로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시기를 의미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한반도의 고고 문화 단계는 청동기 이후 초기 철기 시대를 상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원사 시대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는 선사 시대 유적이 발견된 사례가 없다. 하지만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가까운 곳, 서울과 경기도 지역 등에서 많은 선사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으므로 도봉구 역시 선사 시대 사람들의 삶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생물 분류학에서 유인원과 구별해 사람[Hominin]으로 분류되는 고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약 12,000년 전 무렵 플아이스토세가 끝날 때까지에 이르는 긴 시간대를 가지는 인류 문화의 원초 단계이다. 구석기 시대라는 용어는 돌을 깨서 만든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던 시대라는 기술 발전 단계상의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구석기 시대 동안 석기는 크고 거친 형태에서 더욱 작고 정교하며 규격화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석기 제작 기술과 석기 형태의 변화를 기준으로 25만~30만 년과 4만 년 전을 경계로 전기·중기·후기 구석기 시대를 나누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도 그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제1간빙기[70만 년 전~65만 년 전]부터 제3빙기[35만 년 전~13만 년 전]까지를 전기 구석기, 제3간빙기[13만 년 전~7만 년 전]부터를 중기 구석기, 약 4만 년 전부터를 후기 구석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 구분은 석기 자료에서 뚜렷한 변화가 인지되어 제시된 것이 아니며, 특히 전기와 중기 석기의 특징 구별이나 유적의 연대 확정이 어려워 분명하지 않다. 다만 후기 구석기 시대의 자료는 돌날을 비롯한 각종 정교한 소형 석기와 눌러떼기 기술의 등장이라는 분명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 그 개념이나 시기 설정에 큰 이론이 없는 편이다.

도봉구와 가까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를 구석기 시대부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면목동, 역삼동, 가락동, 암사동, 상일동 등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는 대체로 서울과 한강을 통해 연결되는 단양, 제천, 충주, 양구, 춘천, 양평 등지에서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유적이 고루 발견되었다. 서울·경기권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구석기 유적은 연천 전곡리 유적이며 그 외에도 연천 원당리와 남계리, 파주 기월리·주월리·금파리 등을 들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뗀석기를 쓰던 구석기 시대에 이어 간석기[磨製石器]를 만들고 사용한 시대라는 뜻으로 구석기 시대와 함께 제창되었다. 그리고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 생활과 토기 제작이 신석기 시대를 정의하는 문화 요소로 추가되었는데, 이런 고전적 정의는 고든 차일드(Gorden V. Childe)가 제시한 ‘신석기 혁명’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널리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가 동시에 등장하는 사례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고, 지역에 따른 편차가 존재해 현재는 신석기 시대를 정의하는 기준이 모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대체로 토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이해하는데,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 의해 최소한 기원전 6300년경 이전에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을 시작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에서 1000년 무렵 청동기 시대가 시작하면서 신석기 시대가 끝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의 식량 채집 단계로부터 식량을 재배하는 생산 경제 단계로 돌입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수렵 채집 경제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는 식물 자원이 널리 채집되어 기원전 4000년대 초에 조와 기장을 재배하는 초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도봉구 인근 지역은 기본적으로 이 중·서부 신석기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경기 지역 신석기 문화 유적은 구리시와 미금시 지역을 비롯하여 남양주시 와부읍과 양주시 은현면 등 여러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지금은 서울특별시 강동구로 편입된 암사동 주거지 유적은 기원전 5000년경의 신석기인이 반움집 생활을 하던 집단 취락의 형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선사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흑도 및 각종 간석기류 등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

한반도와 그에 이웃한 중국 동북 지방의 상당한 부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은 기원전 2000년대 후반기 무렵 유물과 무덤 양식을 비롯한 주요 문화 요소의 구성에서 주변 지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된다. 이는 크게 보면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가 널리 사용되며 사회 복합도가 증가한 시기이다. 이러한 문화상은 그 이전 신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주민 집단이 이주해 시작되었고, 이 시기 주민들이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룬다는 주민 교체설이 1970년대 초에 제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많은 유적들에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어 주민 교체설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동일 문화권 전체의 관점에서 기원전 15~20세기까지 올려 보는 견해들이 제시되기도 하였는데, 현재 대체로 기원전 10~15세기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는 시점은 한국식 동검[細形銅劍]과 원형 점토대 토기가 등장하는 기원전 300년경 초기 철기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본격적인 농경 생활과 더불어 크고 작은 마을이 각지에 나타났으며, 이를 토대로 공동체 차원의 노동력 동원을 전제로 하는 고인돌이 무덤 양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는 신석기 시대 이래의 움집 형태로, 하천 근처의 구릉 위 또는 야트막한 산의 경사면에 움을 얕게 파고 방형 내지 장방형으로 지은 것이 많다. 크기는 일반적으로 대략 15~40㎡로 신석기 시대의 움집과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깊이는 보통 30~50㎝로 훨씬 더 얕아져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발전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도봉구 인근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은 가락동, 명일동, 역삼동의 움집이 대표적이다. 청동기 문화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 중 하나는 민무늬 토기인데, 함경도 방면의 민무늬 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붉은 간 토기[紅陶] 문화의 영향과 평안도 방면의 팽이 모양 토기 문화의 영향이 모두 나타나 한강 유역에서 새로운 혼합 문화가 이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이후]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약 300년간을 초기철기 시대, 기원전 100년경부터 이후 300년 동안을 원삼국 시기 혹은 삼한 시대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 철기 시대란 이 무렵부터 철기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무기와 의기(儀器) 등에서는 여전히 청동기가 많이 제작·사용되고 제조 기술도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청동기로는 흔히 한국식 동검과 잔무늬 거울[細文鏡]이 있다. 삼한 시대 혹은 원삼국 시기라는 명칭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본격적으로 정립하기 전의 단계이다. 반면 이 두 시기를 합한 600여 년간을 단순히 ‘철기 시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초기 철기와 철기 시대는 역사 단계에 포함되므로, 여기서는 유적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겠다. 전반적으로 보아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서는 직접적인 선사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한강 유역 서울의 선사 문화권에 포함되어 그와 궤적을 같이해 왔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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