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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64
한자 -燕山君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은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72년 - 거창 군부인 신씨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76년 - 연산군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06년 - 연산군 사망
이장 시기/일시 1513년 - 서울 연산군묘 강화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37년 - 거창 군부인 신씨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10월 25일연표보기 - 서울 연산군묘 사적 제362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 - 연산군 묘를 서울 연산군묘로 개칭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울 연산군묘 사적 재지정
현 소재지 서울 연산군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N37°39′ 46.4245″ E127° 01′ 07.6411″)지도보기
원소재지 서울 연산군묘 원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성격 능묘
양식 원형 쌍분
관련 인물 연산군(燕山君)[1476~1506]|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
봉분 크기/묘역 면적 연산군 200㎝[봉분 높이]|600㎝[지름], 거창 군부인 200㎝[봉분 높이]|600㎝[지름], 묘역 면적 약 14,301㎡[4,326평]
소유자 국유
관리자 정릉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

[개설]

서울 연산군묘는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배위(配位) 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의 무덤이다.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왕릉이 아닌 ‘묘’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넓은 영역의 가장 상단에 연산군거창 군부인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바로 아래에는 태종(太宗)의 후궁인 의정 궁주 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과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묘가 있다. 묘역의 입구에는 재실이 있다. 재실에는 ‘연산군 묘려 중건기(燕山君墓閭重建記)’와 ‘갑오 오월 일 십사 일 대신 비국당상 입대 시(甲午五月日十四日大臣備局堂上入侍時)’, ‘을미 삼월 초사 일 좌직 승지 입시 시(乙未三月初四日坐直承旨入侍時)’라는 제(題)의 현판이 걸려 있다.

[위치]

서울 연산군묘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도봉산 한 줄기인 시루봉 끝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고갯길을 넘어가면 도로 오른쪽에 위치한다.

[변천]

서울 연산군묘의 초장지(初葬地)는 유배지이었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 부군당(府君堂) 인근에 있었다. 1512년(중종 10)에 부인인 거창 군부인 신씨가 양주 해촌(海村)[원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할 것을 청하여 1513년(중종 8) 대군의 예로 개장하였다. 이후 1524년(중종 19) 연산군의 사위인 구문경과 딸 휘순 공주의 무덤이 이곳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1537년(중종 32) 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가 연산군의 봉분 동쪽에 마련되었다.

한편, 의정 궁주 조씨의 묘가 서울 연산군묘 바로 아래에 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즉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 대군(臨瀛大君)이 이 땅을 사패지로 받으면서 왕명에 의해 임영 대군이 후사가 없던 의정 궁주의 제사를 모시게 됨에 따라 1454년(단종 2) 현 위치에 의정 궁주 조씨의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임영 대군의 외손녀인 거창 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 궁주의 묘 위쪽에 연산군 묘역이 이장되어 마련되었다.

[형태]

서울 연산군묘는 봉분이 두 개인 쌍분으로 서쪽 봉분이 연산군, 동쪽 봉분이 거창 군부인이다.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북에서 정남으로 향하여 입지하여 있다. 봉분은 원형이며 용미(龍尾)[무덤의 분상 뒤를 용의 꼬리처럼 만든 자리]는 비교적 짧고, 용미 하단에는 계체석(階砌石)을 길게 둘렀다. 봉분 주위로는 동쪽·서쪽·북쪽 삼면에 곡장(曲墻)을 둘렀는데,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묘역의 영역은 크게 상계(上階)와 하계(下階)로 나뉘었고, 그 사이는 계체석으로 구분 짓고 높이를 달리하였다. 상계에는 봉분, 묘비 한 쌍, 신혼유석, 혼유석, 석상 한 쌍, 석망주 한 쌍을 두었고 하계에는 향로석, 장명등 한 쌍, 문석인 한 쌍을 두었다.

묘비는 연산군거창 군부인의 봉분 정면에 묘표(墓表)의 형식으로 각각 조성하였다. 두 묘비 모두 구름무늬로만 개석을 장식하고, 대석은 방형인 화관 방부형(花冠方趺形)이다. 연산군 묘비의 개석에는 피어오르는 겹구름무늬를 크게 배치하였고, 대석은 마모가 심하여 문양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거창 군부인의 묘비는 대리석으로 만든 듯하나, 거의 마모되어 현재는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개석에는 구름무늬를 여의운문(如意雲紋) 형태로 조각하였다. 16세기 전반기 화관 방부형 묘비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연산군 묘비는 총 높이 163㎝이고, 개석은 61×21.5×43㎝, 대석은 86×51×28㎝이다. 거창 군부인의 묘비는 총 높이 172㎝이고, 개석은 61×23×39㎝, 대석은 90×56×39㎝이다.

석상은 각각 족석(足石) 두 쌍을 이용하여 받쳤다. 석상의 앞은 상계의 계체석의 끝에 맞추어 설치하였고, 그 뒤로 혼유석과 묘비를 차례대로 놓았다. 이는 조선 전기 묘역 상설의 주요 특징이다. 족석은 배가 살짝 부른 고복형(鼓腹形)으로 상·하단에 굵은 연주문을 양각하였다. 배 부분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마모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연산군 봉분 앞의 석상은 168×108.5×27㎝의 규모이고, 거창 군부인 봉분 앞의 석상은 162.5×108.5×26.5㎝의 규모로 둘이 거의 유사하다. 연산군 봉분 앞의 혼유석은 근래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거창 군부인 봉분 앞의 혼유석은 가로 95×세로52㎝의 규모이다.

향로석은 두 상석 사이에 1기만 조성하였는데, 하계로 한 단 내려와 위치하였다. 육각 향탁의 형태로 운족(雲足)을 길게 늘였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긴 다리는 각 모서리에 돋을새김하고 그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연결하였으며, 발은 밖으로 둥글게 말린 호족형(虎足形)이다. 규모는 38×33×56.7㎝이다.

[금석문]

연산군 묘비거창 군부인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연산군 묘비의 앞면 가운데에는 ‘연산군 지묘(燕山君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덕 팔 년 이월 이십 일 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어 15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창 군부인 묘비의 앞면 가운데에는 ‘거창 신씨 지묘(居昌愼氏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가정 십육 년 유월 이십육 일 장(嘉靖十六年六月二十六日葬)’이라고 새겨져 있어 153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서울 연산군묘는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조성되어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으며, 2011년 7월 28일 ‘연산군 묘’에서 ‘서울 연산군묘’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묘역 면적은 1만 4301㎡이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묘역 일대를 정비하여 관리 사무실이 마련되고 묘역 일대와 더불어 재실도 정비되었다. 비공개 무덤이었으나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현재 매년 양력 4월 2일에 제향[연산군 청명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서울 연산군묘는 대군의 격식에 따라 조성된 ‘묘’의 형태이다. 특히 16세기 쌍분 합장묘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반면, 이와 비교할 수 있는 묘가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묘이다. 광해군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하여 있는데, 원형 쌍분의 합장 형식, 2단으로 구성된 점은 서울 연산군묘와 동일하다. 그러나 장명등은 1기만 조성하였고, 문석인도 한 쌍만 조성하여 조선 후기 ‘묘’ 석물 수량이 변화되었다.

또 석망주의 위치도 서울 연산군묘에는 상계에 위치하다가, 광해군 묘에는 하계로 변화되었다. 또한 석상의 위치도 서울 연산군묘는 상계에 있던 것을 광해군 대는 상계 계체석을 뒷받침으로 삼아 아래로 한 단 내려와 하계에 위치하여 있어 상설 위치에 변화가 있다. 따라서 서울 연산군묘는 조성 연대가 뚜렷한 묘로 16세기 전반 사대부 묘의 영역 면적, 석물의 배치와 구성, 상설 위치 등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묘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공** 왜!아무이유 없는 태종의후궁 묘가 연산군묘 바로 밑에있는지 궁금합니다 태종의 후궁이면 연산군보다 위의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밑에무덤이있는지매우궁금합니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정궁주의 묘가 있는 자리는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었는데, 의정 궁주의 제사를 임영 대군이 맡게 되자 그곳에 궁주를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의 <서울 연산군 묘> 항목 [변천] 부분과 <의정 궁주> 항목을 검색하여 보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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