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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65
한자 -楚安山墳墓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외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은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0년연표보기 - 한국미술사연구소 학술 지표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3월 9일연표보기 - 서울 초안산 분묘군 사적 제44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울 초안산 분묘군 사적 재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 - 초안산 조선 시대 분묘군을 서울 초안산 분묘군으로 개칭
현 소재지 서울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외|노원구 월계동 산8-3 외(N37° 38′ 23.6690″, E127° 02′ 51.6759″외)지도보기
성격 분묘군
관련 인물 최숙동(崔淑仝)|문연주(文延周)|정현립(鄭顯立)|정허농(鄭許農)|이홍달(李弘達)|이상훈(李尙薰)|이봉령(李鳳齡)|박의숙(朴義淑)|이묵선(李墨善)
봉분 크기/묘역 면적 319,503㎡[96,649.66평]
관리자 서울특별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 일대 초안산에 있는 조선 시대 분묘군.

[개설]

서울 초안산 분묘군은 조선 시대 사대부, 무관, 중인, 서인, 내시, 상궁 등 다양한 신분층의 묘와 석물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초안산 중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속하는 지역은 약 5만 8000㎡이고, 나머지는 모두 노원구에 속한다. 태안 이씨(泰安李氏)밀양 박씨(密陽朴氏)의 묘역은 도봉구 지역, 예안 이씨(禮安李氏)의 묘역은 노원구 지역에 있다. 내시, 서인, 상궁 등의 묘는 여러 능선에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태안 이씨 묘역초안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이해(李以楷)[1707~1771]의 묘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밀양 박씨 묘역태안 이씨 묘역에서 북쪽 도로 맞은편에 있는데, 증 군자감 정(贈軍資監正) 이의숙(李義淑)[1534~1646]의 묘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예안 이씨 묘역은 초안산의 남동쪽에 있는데, 좌의정 이명(李蓂)[1496~1572]의 묘와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내시 묘로는 원래 김계한(金繼韓)[?~1624]과 김광택(金光澤) 묘가 있었으나 현재는 양주시 광적리 효촌리로 이장하였다. 초안산에 현전하는 내시 묘로는 내시부 상세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 등이 있고,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 묘 등이 전한다. 내시와 서인은 묘주를 알 수 없는 묘와 석물이 대부분이다.

[위치]

서울 초안산 분묘군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번지와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에 위치한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서 월계로를 따라 중랑천 위에 놓인 월계1교를 건너 번동 방향으로 직진하면 우이천 위에 놓인 월계2교가 나오는데, 월계1교와 월계2교 사이로 난 월계로의 북단과 남단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역사 문화 공원으로 조성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각종 체육 시설과 약수터가 있는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서울 초안산 분묘군은 조선 시대 15세기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조성된 분묘이다. 2000년 한국 미술사 연구소의 학술 지표 조사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노원구 모두 합쳐 총 1,154기의 묘와 상석 511개, 향로석 210개, 석인상 169개, 묘비 182개, 비석 대좌 123개, 석망주 58개, 초석 2개, 장명등 1개 등 약 1,256개의 지표상의 석물을 확인하였다. 도굴 및 이장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현재는 돌보는 후손이 없어서 이름 없는 묘와 파손되었거나 매몰된 석물이 산재하고 있다.

[형태]

서울 초안산 분묘군 중 도봉구에 위치한 주요 인물은 통훈대부 충주 최씨(忠州崔氏) 최숙동(崔淑仝), 정헌대부 박상□(朴尙□), 지중추부사 문연주(文延周), 가선대부 정현립(鄭顯立), 통정대부 정허농(鄭許農) 등이고, 태안 이씨의 증 공조 참의 이홍달(李弘達), 증 형조 참판 이상훈(李尙薰), 증 공조 판서 이봉령(李鳳齡)밀양 박씨의 증 군자감 정 박의숙(朴義淑), 증 동지중추부 이묵선(李墨善) 등이 있다.

서울 초안산 분묘군 중에는 승극철을 중심으로 한 내시 묘와 연양군파(延陽君派)의 내시 묘 약 100기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현재 행정 구역상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속하기는 하지만 역사·문화적으로 같은 영역권이기 때문에 서울 초안산 분묘군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좁은 구역에 봉분과 석상(石床), 묘표를 밀집하여 구성하였다. 봉분은 대부분 호석 없이 만들었으며 부부 합장묘의 경우도 많다.

분포한 석물은 크게 묘비, 석인, 향로석, 석망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신도비나 묘갈은 태안 이씨·밀양 박씨·예안 이씨 등의 것이고, 그 외 다른 계층은 대부분 묘표의 형태이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 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 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다수이다. 특히 방형의 비대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 등을 조각하거나 아무 문양을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팔작지붕이 있는 개석이 유행하였지만, 초안산 지역에는 위가 둥근 원수 방부형이나 대석에 문양을 넣지 않은 단순하고 간략한 형태의 묘표를 집중적으로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중인이나 내시, 상궁 등 계층상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추정된다.

남아 있는 석인은 예안 이씨 묘역에서 15~16세기 중반의 문석인상이 있고, 그 외 다른 계층에서는 양관 조복(梁冠朝服)을 갖춘 문석인이 많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인도 많다. 이 석인들은 대부분 17~18세기에 조성된 것이며, 18세기 중반 이후의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나 노원구 모두에 해당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석물 중 특징적인 것은 석상과 향로석이다. 석상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고인 형태이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고, 특히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의 독특한 묘제 석물로 초안산 지역에 유난히 많이 조성되었다.

초안산의 중인, 서인, 내시, 상궁 등의 분묘는 현재로는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파손되었고 봉분은 흙이 깎여 나간 상태이다. 그러나 산재되어 있는 각종 석물들로 보아 15세기 이후 조성이 시작되었지만, 집중적으로 묘가 만들어진 것은 17~18세기라고 할 수 있다. 묘역 구성은 간소하고 밀집형이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를 주로 제작하였다.

[금석문]

최숙동 묘표[1765], 박상□(朴尙□) 묘표[1800], 문연주(文延周) 묘표[1777], 정현립(鄭顯立) 묘표[1724], 정허농(鄭許農) 묘표[1652], 김승신(金承信) 묘표[1783], 정은익(鄭殷益) 묘표[1691], 김광감(金光鑑) 묘표[1690], 한양부 좌윤 임수흥(任守興) 묘표[1823], 임창문(任昌文) 묘표[1837], 부평 진씨(富平秦氏) 묘표[1616], 승극철(承克哲) 묘표[1634] 등이 있다. 그 외 태안 이씨의 여러 묘비, 밀양 박씨 묘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속하는 금석문은 최원동 묘표, 문연주 묘표, 정현립 묘표, 정허농 묘표, 태안 이씨 묘표, 밀양 박씨 묘표 등이다.

[현황]

서울 초안산 분묘군의 묘들은 문인 문중을 제외한 서인·중인의 묘는 현재 돌보는 후손이 없어 대부분 봉분이 없어지고, 묘비가 파손·도굴되거나 이장된 것이 많다. 따라서 땅속에 매몰된 묘와 석물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상태로는 다양한 신분층의 분묘군이고, 수량으로 보아 대규모의 조선 시대 분묘임을 짐작만 할 뿐이다. 서울 초안산 분묘군은 2002년 3월 9일 사적 제44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도봉구에 해당하는 초안산 분묘군 문화재 구역은 2015년부터 문화재청 정비 사업으로 토지보상사업이 진행중이며, 토지보상사업 종료 후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인근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의의와 평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은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묘역이 조성된 특징 있는 분묘이다. 그러나 묘주나 기록이 뚜렷한 묘표, 온전한 형태의 묘가 많지 않아 전반적인 묘제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다만 남아 있는 묘표, 문석인, 동자석인, 석상과 향로석 등의 형태와 양식으로 보아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묘역임을 알 수 있으며, 양인 계층의 상설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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