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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00
한자 金壽增
이칭/별칭 연지(延之),곡운(谷雲),화음동주(華陰洞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4년연표보기 - 김수증 생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김수증 생원시 2등 합격
몰년 시기/일시 1701년연표보기 - 김수증 졸
거주|이주지 김수증 은거지 -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
거주|이주지 김수증 은거지 -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삼일리
거주|이주지 김수증 은거지 -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부임|활동지 김수증 부임지 - 강원도 평강군
부임|활동지 김수증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부임|활동지 김수증 부임지 - 평안남도 성천군
부임|활동지 김수증 부임지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묘소|단소 김수증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사당|배향지 춘수 영당 - 강원도 춘천시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청풍 군수

[정의]

도봉 서원 각석군에 글씨를 남긴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화음동주(華陰洞主).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김광찬(金光燦)이며, 동생은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이다. 외할아버지는 김래(金琜)이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집안은 16세기 중반 이후 서울 장동(壯洞)[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효자동·창성동에 걸쳐 있던 마을] 일대에 세거하면서 서인 노론(老論)계의 중심 세력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 정치·학문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활동 사항]

김수증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김상헌을 모시고 수학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1650년(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세마(洗馬)를 시작으로 형조정랑, 공조정랑, 평강 현감, 청풍 군수, 성천 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숙종 대 격심한 정국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던 그의 가문 때문에 벼슬살이에 기복이 많았다. 이 때문에 김수증은 일찍이 전국의 유명한 명승지나 산천을 유람하거나 은거하기를 반복하였다.

김수증의 첫 은거지는 1670년(현종 11) 47세 되던 해에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지은 농수 정사(籠水精舍)이다. 5년 뒤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형 김수항이 유배되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근처의 용담 계곡을 주자(朱子)의 무이 구곡(武夷九曲)을 모방하여 곡운 구곡(谷雲九谷)이라고 개명하고 평양 출신의 화가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아홉 굽이의 실경을 그려 『곡운구곡도(谷雲九谷圖)』 화첩을 만들었다. 1689년(숙종 15)에는 기사환국으로 김수항이 죽자 곡운 계곡 근처의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복권된 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화악산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김수증도봉 서원 주변의 계곡 바위에 ‘고산앙지(高山仰止)’ 네 글자를 남겼는데, 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 편(車舝篇)에 나오는 ‘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은 많은 사람이 다닌다]’라는 글귀를 인용한 것이다. 이는 김수증도봉 서원에 배향된 송시열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다음의 일화가 바탕이 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준길(宋浚吉)이 죽기 전 병석에서 송시열을 매우 그리워하면서, 벽에 ‘고산앙지경행행지’라는 구절을 걸어 놓고 송시열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그리워하였다고 하며, 이 일은 두고두고 노론 계열의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김수증 역시 송시열과 막역한 관계였던 안동 김문의 일원으로 도봉 서원을 찾아 그를 기렸던 것이다.

[학문과 저술]

김수증은 따로 학문적인 저술을 남긴 것은 없지만, 화악산에 은거할 때 북송 대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술을 많이 읽고 그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거나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 팔괘도(先後天八卦圖)’를 바위에 새겼다는 기록으로 볼 때 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집인 『곡운집(谷雲集)』에 여러 산천과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남긴 기행문이 많이 남아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강원도 춘천의 춘수 영당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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