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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01
한자 南宮枕
이칭/별칭 성중(誠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3년연표보기 - 남궁침 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남궁침 별시 병과 5위
몰년 시기/일시 1567년연표보기 - 남궁침 졸
묘소|단소 남궁침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지도보기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함열(咸悅)
대표 관직 형조 참판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성중(誠仲). 할아버지는 남궁찬(南宮璨)이고, 아버지는 동복 현감 남궁익(南宮翼)이다. 외할아버지는 김인각(金麟角)이며, 장인은 허윤관(許允寬), 숙부는 남궁숙(南宮淑)이다.

[활동 사항]

남궁침(南宮枕)[1513~1567]은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544년(중종 39)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46년(명종 1) 지평·헌납·부수찬을 지내고 1547년(명종 2)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지만 지평으로 개수되고, 이 시기에 역적 이완(李岏)을 처벌할 것, 윤원로(尹元老)를 처벌할 것, 호남의 진휼을 확대 실시할 것 등을 극력 간하였다. 1548년(명종 3) 홍문관 부수찬에 이어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명종 7)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어 민생의 현황을 살피고 지방 수령들의 탐학을 살피고 돌아와서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고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5년 정도 승정원에서 일을 하다가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 1558년(명종 13)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옥구 현감 김찬(金璨)이 형벌을 남용한 사건을 장계하여 단호하게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으며, 1565년(명종 20) 함길도 관찰사, 이듬해에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으로부터 “가는 곳마다 삼가지 아니하고 이익을 도모하며 사사로움을 경영하여 물의에 버림을 받는다.”라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 사리사욕만 채운다는 물의를 일으켜 파직되었지만 곧 복직되고, 1567년(명종 22) 형조참판을 역임하다가 죽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자리한 함열 남궁씨 묘역에 위치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무수골 매표소를 지나면 나오는 큰 골짜기에 함열 남궁씨 묘역이 위치하는데, 이 묘역은 크게 3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만세재에서 서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약 1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제1군 묘역에 남궁침의 묘소가 자리한다. 남궁침의 묘는 단분 합장묘이며 호석을 두르고 있다.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장명등과 같은 옛 석물이 묘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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