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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16
한자 南宮墣
이칭/별칭 노은(蘆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연표보기 - 남궁복 생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남궁복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 창립
몰년 시기/일시 1970년연표보기 - 남궁복 졸
부임|활동지 남궁복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묘소|단소 남궁복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22
사당|배향지 남궁복 기념비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한학자
성별
본관 함열(咸悅)
대표 관직 양주 향교 전교

[정의]

도봉 서원의 중건에 힘쓴 한학자.

[가계]

본관은 함열(咸悅). 아버지는 양주군 해등 촌장(海等村長)을 지낸 남궁희(南宮熺)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다. 부인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슬하에 남궁전과 남궁수, 남궁련(南宮鍊)을 두었다.

[활동 사항]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1696년(숙종 22)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세도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는 서원 철폐령을 단행하여, 도봉 서원도 이때 함께 훼철되었다.

그러나 1903년(고종 40)부터 양주, 포천, 파주 등지 유림들의 주도로 도봉 서원 옛터에 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조광조송시열을 추모하는 제향을 지냈다. 남궁복(南宮墣)[1887~1970] 역시 18세 때부터 선조를 따라 향사에 참여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향사가 중단되었다.

남궁복은 성균박사(成均博士), 양주 향교 전교를 중임하고, 이승만·김병로 등과 교우(交友)하였다. 1970년 성현(城峴)[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살면서 양주 향교 전교로서 발의하여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경향 유지의 찬조를 받아 도봉 서원을 중건하려 하였던 남궁복은 평생의 소원인 도봉 서원 중건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이에 해운 공사와 극동 해운 사장, 조선 공사 회장인 아들 남궁련에게 서원을 중건할 것을 유언하였다. 1971년 남궁련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의 중심인물로 힘써 도봉 서원 사우(祠宇) 3칸과 유도문(由道門)이 준공되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도봉 서원 중건에 힘쓴 공로로 도봉 서원 앞에 남궁복을 기념하는 ‘성균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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