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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26
한자 李秀彦
이칭/별칭 미숙(美叔),농계(聾溪),취몽헌(醉夢軒),정간(正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이수언 생
몰년 시기/일시 1697년연표보기 - 이수언 졸
부임|활동지 이수언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국계 서원 -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韓山)
대표 관직 도봉 서원 원장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 원장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미숙(美叔), 호는 농계(聾溪)·취몽헌(醉夢軒).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를 역임한 이동직(李東稷)이다.

[활동 사항]

이수언(李秀彦)[1636~1697]은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1669년(현종 10)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정언·지평을 역임하고 1681년(숙종 7) 응교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특진된 뒤 승지·대사간·대사헌 등을 지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도(門徒)로 젊은 무리에게 배척되어 조정에서 편안할 수가 없었으나, 일을 만나면 번번이 모두 말하고 숨기지 않았다. 특히 송시열을 비호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가, 결국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초산(楚山)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으로 소론인 오도일(吳道一)을 탄핵하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내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주에 내려갔다. 그 뒤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판윤·참찬·지중추부사 등의 벼슬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이 그의 용퇴와 지조를 높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수언도봉 서원의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는 서인계 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즉 서인계 서원에서는 자파의 중앙 관료를 서원의 원임으로 임명하여, 중앙과 지방 권력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모색하려는 정파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수언은 1696년(숙종 22) 송시열을 향사하고 추모하는 데에 많은 힘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도봉 서원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향사를 실현하기까지에는 당쟁의 양상에 따라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숙종송시열도봉 서원에 합향(合享)시키려는 움직임을보이자 반(反) 노론계 당색이나 이에 동조하는 각 지방 사림 세력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1696년 형조에서 이수언과 이수현(李秀賢)이 기묘사화를 선동한 이유청(李惟淸)의 후손인데, 이수언도봉 서원 원장이고 이수현은 소두(疏頭)가 되어 송시열도봉 서원 병향을 주장하였다며 벌을 내릴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도봉 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고, 1689년(숙종 15) 왕세자[경종]의 책봉을 반대해 남인 정권에 희생된 송시열을, 이수언 등의 노력으로 1696년 추향함으로써 명실공이 율곡 학파의 적통을 잇는 기호 사림의 중심 서원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도봉 서원은 양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의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으로 근기 지방 사림의 공론을 취합·대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759년(영조 35) 어필 사액(御筆賜額)을 받으면서 위상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영조는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을 조광조에서 송시열로 계보화하면서, 조광조송시열을 배향하는 도봉 서원이 학문적 정통성을 지닌 도학의 연마장이라는 뜻을 함축적으로 드러냈다.

[상훈과 추모]

『숙종실록』 졸기에 따르면, “이수언은 재능과 기량이 있어 세상에 등용되기는 넉넉한데도 자취가 시대와 어긋나 그의 기용을 끝까지 못하였음을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청주의 국계 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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