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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33
한자 李齊閔
이칭/별칭 경은(景誾),서간(西澗)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28년연표보기 - 이제민 생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이제민 식년 문과 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이제민 졸
부임|활동지 이제민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부임|활동지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로 재임하며 도봉 서원 설립에 공헌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은(景誾), 호는 서간(西澗).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의성군(宜城君) 이채(李寀)이고, 할아버지는 영신수(永新守) 이이(李怡)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증 함원군(咸原君) 이옹(李顒)이며, 어머니는 채중경(蔡仲卿)의 딸인 평강 채씨(平康蔡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박씨이며, 두 번째 부인은 조씨인데 각각 딸 하나씩을 낳았다. 측실이 2남을 낳았다.

[활동 사항]

이제민(李齊閔)[1528~1608]은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2년(명종 17) 사간원 정언에 올랐으며, 이어서 홍문관 부수찬·사간원 정언·홍문관 수찬·병조좌랑·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다가 1566년(명종 21)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정랑·이조정랑 등을 지냈고, 1571년(선조 4) 6월에 경주 부윤이 되었으며, 1574년(선조 7) 양주 목사가 되었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 당시 양주 목사였던 남언경(南彦經)의 발의로 설립이 추진된 서원이었다. 북쪽에 사우(祠宇)를 두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갖춘 후 남쪽에 강당을 설치하고 양쪽에 협실을 두었으며, 전면에 행랑채와 정문을 만들었다. 공사가 대강 완성되었지만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남언경이 질병으로 양주 목사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양주 목사로 오게 된 이제민남언경의 뜻을 이어받아 선비 식당의 기구와 장서실과 제수를 차릴 주방 등을 차례로 완성하여 1574년 여름 완공시켰다.

1584년(선조 17) 경기도 감사, 1589년(선조 22) 사간원 대사간 등에 발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성천 부사로 재직하였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임소(任所)를 떠나지 않고 견고히 지켰다. 1593년(선조 25)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임 중 임진왜란 때 파괴된 선릉과 정릉을 살펴 임금에게 아뢰었으며, 대사간·대사헌을 맡아 국왕이 선위(禪位)하겠다고 하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고 이밖에 다른 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간쟁하면서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1599년(선조 32) 중전(中殿)이 수안(遂安)에 머물러 있을 때 공을 세워 상으로 승직되었다. 1603년(선조 36) 기로소(耆老所)가 설치되어 76세 때 기로소에 들어 일등(一等)의 술을 하사받았다. 기로소 당상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통교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정을 탐지해서 신중하게 국교를 재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상훈과 추모]

80세 때인 1607년(선조 40) 가자(加資)되어 특지로 종1품 숭정대부 행참찬(崇政大夫行參贊)이 되는 은지(恩旨)를 입었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2.07 한자 수정 이보(李補)->이보(李𥙷)
이용자 의견
정** [가계]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현손으로,} 에서
효령대군의 휘자 補를 𥙷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대군의 휘자는 衣변이 아니고 示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에도 함께 수정 하여 주십시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한자를 수정하였습니다.
20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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