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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11
한자 南宮憘
이칭/별칭 구중(懼仲),교리공(校理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남궁희 경자 식년시 진사 급제
묘소|단소 남궁희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함열(咸悅)
대표 관직 사섬시 정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구중(懼仲).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남궁찬(南宮璨)이고, 아버지는 동복 현감 남궁익(南宮翼)이다. 어머니는 김인각(金麟角)의 딸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남궁희(南宮憘)[?~?], 남궁침(南宮枕), 남궁개(南宮愷)를 낳았다. 부인은 정희년(鄭熙年)의 딸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슬하에 남궁활(南宮活)과 남궁철(南宮澈) 두 아들을 두었다. 함열 남궁씨 7파(派)의 형성 이후 교리공파(校理公派) 파조로 추숭되었다.

[활동 사항]

남궁희는 1540년(중종 35) 시행된 경자 식년시에서 진사 1등 4위에 올랐다. 1546년(명종 1)에는 기유 식년시에 응시하여 병과에 11위로 급제한 뒤 권지교서관 부정자를 역임하였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1557년(명종 12) 남궁희의 관직이 정5품 호조정랑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7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호조정랑에서 파직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청하집(靑霞集)』에 따르면, 이후 남궁희는 조정에 복귀하여 정3품 사섬시 정(司贍寺正)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함열 남궁씨 제1 묘역 내 선친 남궁익 및 형제 남궁침, 남궁개의 묘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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