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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4
한자 崔岦
이칭/별칭 간이(簡易),동고(東皐),입지(立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9년 5월 3일연표보기 - 최립 생
몰년 시기/일시 1612년 7월 13일연표보기 - 최립 졸
출생지 최립 출생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최립 묘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삼방리
성격 문신|문인
성별
본관 통천(通川)
대표 관직 동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에 대한 시를 남긴 문인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아버지는 진사 최자양(崔自陽)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이다. 부인은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한산 우씨(韓山禹氏)로 최동망(崔東望), 최동문(崔東聞), 최동관(崔東觀)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립(崔岦)[1539~1612]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6년 뒤인 1561년(명종 16) 문과 시험에 장원 급제한 이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문장력을 인정받아 1577년(선조 10)과 1581년(선조 14)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여러 차례 작성하였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군량을 요청하기 위한 주청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에는 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여러 차례 맞이하여 많은 시문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은퇴하였다.

[학문과 저술]

젊은 시절부터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릴 만큼 문장이 뛰어났으며,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최립은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체를 추구하는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매우 뛰어났다. 특히 반고(班固), 한유(韓愈)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 문장이 복잡하고 난해하더라도 철저히 그 작법(作法)을 따랐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이 있고, 시학서(詩學書)로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어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 2권의 저서가 있다. 그밖에 행주 전승비(幸州戰勝碑), 윤임 신도비(尹任神道碑), 윤두수 신도비(尹斗壽神道碑) 등 여러 비문을 남겼다.

도봉 지역과 관련하여 『간이집』 제6권에 「차운하여 도봉 서원에 제하다[次韻題道峯書院]」라는 시를 남겼는데, 도봉 서원이 위치한 곳의 아름다운 환경과 함께 학문의 전당으로서 도봉 서원에 거는 그의 기대를 알 수 있다. 시는 아래와 같다.

영욕신규여구기(榮辱新規與舊基)[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도봉종각설명기(道峯終覺設名奇)[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암암수색당공용(巖巖秀色當空聳)[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활활한류부잠쇠(活活寒流不蹔衰)[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게타전현삼척강(揭妥前賢森陟降)[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장수후학근미위(藏脩後學謹微危)[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만정이적수정사(幔亭異迹輸精舍)[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금견오동일무이(今見吾東一武夷)[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 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묘소]

묘는 본래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에 있었으나 이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삼방리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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