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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64
한자 金宇顒
이칭/별칭 숙부(肅夫),직봉(直峯),동강(東岡),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0년 7월 2일연표보기 - 김우옹 생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김우옹 진사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03년 11월 9일연표보기 - 김우옹 졸
추모 시기/일시 1603년 - 김우옹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16년 - 김우옹 회령 오산서원에 위패 봉안
추모 시기/일시 1628년 2월 - 김우옹 성주 회연서원에 위패 봉안
추모 시기/일시 1691년 - 김우옹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23년 - 김우옹 신도비 건립
출생지 성주 사월곡리
거주|이주지 청주 정좌산
부임|활동지 안동
유배|이배지 회령
묘소|단소 성주
사당|배향지 오산 서원 -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현재의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학천리
사당|배향지 회연 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성(義城)
대표 관직 이조참판|예조참판

[정의]

도봉 서원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한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직봉(直峯)이며 자호(自號)를 동강(東岡)이라 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고 증 통훈대부 통예원 좌통례(故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 김종혁(金從革), 할아버지는 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故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김치정(金致精)이다. 아버지인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희참(金希參)은 행삼척도호부사(行三陟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자헌대부 이조참판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빈객(資憲大夫吏曺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청주 곽씨(淸州郭氏)로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상주 김씨(尙州金氏)로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조카딸이며, 슬하에 1남 김효가(金孝可)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우옹은 1540년 7월 2일 성주(星州)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19세의 나이에 진사 회시(進士會試)에 급제하였으며, 남명 조식의 조카딸과 혼인한 이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 않았으며, 1572년에 다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조정에서 다시 부르자 사양하지 못하고 관직에 나아가 수차례 주강(晝講)과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였으며,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1574년(선조 7)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문이습관(吏文肄習官)으로서 성과가 좋지 못하다 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고 곧바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을 지냈다. 이듬해에 다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병이 있다 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1579년에야 다시 주강에 입시하고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에는 선위사(宣慰使)로서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 등을 맞아 서울까지 영접하였으며, 이듬해에 부응교에 임명되자 물러날 것을 청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윤허하지 않고 곧장 사인에 임명하고 다시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 안동 부사(安東府使)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에게서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사면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이듬해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접반사(接伴使),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선조가 환도할 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이후 다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겸 세자좌부빈객(大司憲兼世子左副賓客), 대호군 겸 예문관 제학(大護軍兼藝文館提學), 대사간, 이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예조참판(禮曹參判)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600년(선조 33)에 사직하고 선영(先塋)을 돌보면서 지내다가 청주 정좌산(鼎坐山)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몇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03년 11월 9일 청주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경연에서 요(堯)·순(舜)·우(禹)·탕(湯)의 심법(心法)을 강설하며 유교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도리를 역설하였으며,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을 강조하였다. 만력(萬曆)[중국 명나라 신종의 연호, 1573~1619] 연간에는 경연에서 향약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남명 조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행장과 행록(行錄)을 지었다. 왕명에 의해 『성학 육잠(聖學六箴)』을 지어 올렸으며, 대사성으로 있을 당시에는 『학제 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수시로 시무책(時務策)을 올렸으며 「중흥 요무 팔조(中興要務八條)」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저서 『속 자치통감 강목(續資治通鑑綱目)』과 편서 『경연 강의(經筵講義)』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동강집(東岡集)』이 있다.

[묘소]

김우옹이 세상을 뜬 해에 조카인 김행가(金行可)와 김충가(金忠可)가 문인(門人) 이육(李堉) 등과 함께 김우옹의 관을 성주의 옛집으로 가지고 와서 이듬해인 1604년 2월 4일에 성주 서쪽 금파곡(琴琶谷) 만리(蔓里)의 감산(坎山)에 매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우옹이 세상을 떠난 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빈객(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으로 특별히 추증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 회령(會寧)의 오산 서원(鰲山書院)이 완성되자 김우옹의 위패(位牌)를 그곳에 봉안하였다. 1628년 2월에 위패를 성주 회연 서원(檜淵書院)에 봉안하고, 1691년(숙종 17)에 시호를 내리기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인 『동강집』이 간행되었는데,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서문(序文)을, 이현일(李玄逸)이 발문(跋文)을 썼다. 1723년(경종 3)에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찬한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한편 영남(嶺南)의 유생들이 김우옹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리기도 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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