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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683
한자 鄭寅普居住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595-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940년 8월 16[음력]연표보기 - 정인보 간송 전형필의 창고에 붙은 초가집에 세듦
이전 시기/일시 1945년 3월연표보기 - 정인보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595-1번지에서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주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정인보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현 소재지 정인보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595-1[도봉구 쌍문동 587]지도보기
성격 거주지
관련 인물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있던 정인보의 거주지.

[개설]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에 걸쳐 활동한 우리 근대사의 대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강화도 출신의 저명한 양명학자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을 사사(師事)하여 실학으로서의 양명학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민족주의 역사학·한문학·시조 문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민족 문화 창달에 끼친 공로가 자못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거기다 집안 전래의 전답을 팔아 독립군 양성소에 군자금을 대거나, 직접 만주와 상해를 옮겨 다니며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등 많은 청년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들을 짚어 국가에서는 1990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보훈처에서는 1993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생을 선정하여 그 공을 기렸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초대 감찰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곧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감찰 위원장에 재직할 때 「광복절 노래」와 「삼일절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북한군에 잡혀 납북된 뒤 한동안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그해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를 피해 1940년 8월경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으로 거주지를 옮겨 와 도봉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1945년 3월 우심해진 일제의 간섭을 피해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정인보창동의 이 집에 거주하며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등과 이웃하여 어두운 한 시절을 견뎠다. 도봉 지역에는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정인보를 꼽아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하였다는 일화가 자랑스럽게 구전되고 있다.

[위치]

정인보 거주지(鄭寅普居住地)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3-4번지이었다가,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595-1번지[도봉구 쌍문동 587]가 되었다.

[형태]

정인보 거주지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의 창고에 딸린 초가이었으나, 사랑방도 갖출 만큼 제법 규모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황]

현재 옛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조그만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1944년 8월부터 1945년 3월 사이의 창동 시절은 정인보에게 은둔기에 해당한다. 정인보는 연희 전문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창동 집으로 은거하여 자리보전을 함으로써 모든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양심적 지식으로서 일제 강점기 말까지 꼿꼿하게 처신할 수 있었다. 이 시절은 우리 말글의 사용이 금지되던 암흑기이었으므로 정상적인 활동과 올바른 글쓰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인보는 사회 활동과 계몽적 글쓰기를 모두 중지한 채 친척, 지인들의 요청으로 묘표, 묘지명, 서문, 기문 등을 쓰거나 한시, 시조 등을 짓는 등의 사적인 글쓰기만을 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대표적 글로는 「난곡 이 선생 묘표(蘭谷李先生墓表)」, 「백련당기(白蓮堂記)」, 『우리 글씨 쓰는 법』 서문, 「진주 성사첨의 시에 차운한 시」[한시 7수], 「벽초 딸 삼형제를 강정리로 보내며」[시조 18수]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암울한 창동 시절이었지만 가정적으로 경사가 없지는 않았다. 1942년에 정인보의 둘째 딸 정경완(鄭庚婉)과 벽초 홍명희의 둘째 아들 홍기무(洪起武)가 결혼함으로써 양가가 사돈의 연을 맺었고[정인보의 공식적인 최초의 글쓰기가 홍명희의 아버지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의 순국을 애도하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양가의 인연은 이미 깊은 바가 있었다], 다음 해에는 외손자를 얻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정경완의 집은 도봉산 자락의 자연 마을인 유만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말의 전시 체제는 정인보의 이런 조그만 누림도 용서하지 않아 가족은 결국 1945년 3월경 전라북도 익산으로 다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근대사를 대표하는 국학자로서 정인보의 중요 업적이 창동 시절에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활동들 또한 민족의 이름으로 기려지는 것이 옳다. 표석이나 안내판을 통해 위당 정인보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알려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고무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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