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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영국사에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28
한자 道峯山靈國寺-
이칭/별칭 「도봉산영국사(道峯山靈國寺)」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인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420년 - 「도봉산 영국사에서」 저자 서거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488년 - 「도봉산 영국사에서」 저자 서거정 사망
배경 지역 영국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성격 한시|칠언 율시
작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

[정의]

조선 초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서거정도봉산 영국사에서 읊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집현전 박사, 대사헌, 대제학,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을 비롯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 여러 저술이 있다.

「도봉산 영국사에서」서거정의 시집인 『사가시집(四佳詩集)』 제5권에 수록되어 있다. 영국사(靈國寺)는 ‘왜란으로 소실된 도봉산 영국사 절터에 1573년(선조 6) 양명학자인 남언경도봉 서원(道峯書院)을 창건하였다’라는 것과 ‘673년에 의상(義湘)이 수도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를 세웠고, 고려 명종영국사(寧國寺)가 들어섰는데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하여 절을 새롭게 고치고 천축사(天竺寺)로 이름을 바꾸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구성]

「도봉산 영국사에서」는 칠언 율시의 구성에 맞게 전개한 한시이다. 수련에서는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 영국사의 모습을, 종일토록 질리지 않게 배회하며 생각에 잠길 만하다고 평하였다. 함련에서는 작가가 영국사 안에서 창문을 열고 베개도 베어 보며 직접적으로 구름 기운과 시내 소리를 느껴 보고 있다. 경련에서는 오래되어 부질없이 서 있는 탑과 글자도 없어지고 이끼가 껴 버린 조각난 비를 묘사하여 더 이상 화려하지 않은 절의 모습을 이야기하였고, 미련에서는 남은 생의 바람은 인간사를 떠나 은거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결연하게 드러내었다.

[내용]

산하하년불찰개(山下何年佛刹開)[산 아래 어느 해에 불찰을 열었던가]

객래종일족배회(客來終日足徘徊)[길손이 와서 종일토록 배회할 만하구나]

개창운기배첨입(開窓雲氣排簷入)[창을 여니 구름 기운은 처마를 밀쳐 들어오고]

의침계성권지래(欹枕溪聲捲地來)[베개 베니 시내 소리는 땅을 말아 오는구나]

고탑유층공백립(古塔有層空白立)[옛 탑은 층층이 부질없이 하얗게 서 있고]

단비무자반청퇴(斷碑無字半靑堆)[조각난 비는 글자도 없이 반쯤 풀로 뒤덮였구나]

잔년진기인간사(殘年盡棄人間事)[남은 생엔 인간사 모두 버리고]

결사향산의불회(結社香山擬不回)[향산에 결사하여 돌아가지 않으리]

‘결사향산의불회(結社香山擬不回)[향산에 결사하여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일찍이 형부상서(刑部尙書)로 벼슬을 물러나고서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는 승속(僧俗)이 서로 종유하면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세상을 떠나 은거하고자 하는 서거정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특징]

상성 ‘회(灰)’ 운으로 제1구의 ‘개(開)’, 제2구의 ‘회(徊)’, 제4구의 ‘내(來)’, 제6구의 ‘퇴(堆)’, 제8구의 ‘회(回)’의 운자를 썼다.

[의의와 평가]

서거정은 이미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버린 절을 찾아가 불찰의 고요함과 탑과 비석의 쇠퇴함을 보고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자신 또한 남은 생을 조용히 은거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옛 절터에 석탑과 사적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잃어버렸다. 「도봉산 영국사에서」에서 서거정은 인적이 끊겨 버린 절터를 묘사하여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는 영국사의 존재를 알리고, 그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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