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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38
한자 次韻-道峯書院-
이칭/별칭 「차운제도봉서원(次韻題道峯書院)」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안정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39년 -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 저자 최립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12년 -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 저자 최립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631년 -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가 수록된 『간이집(簡易集)』 간행
배경 지역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한시|칠언 율시
작가 최립(崔岦)[1539~1612]

[정의]

조선 전기의 문인 간이 최립도봉서원을 두고 읊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도봉서원(道峯書院)은 1573년(선조 6년)에 조광조(趙光祖)를 기리기 위해서 조광조가 자주 찾았던 도봉산 자락의 영국사(寧國寺) 터에 설립한 서원으로, 설립과 동시에 사액(賜額)되었다. 뒤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도봉서원에 머물며 강학을 한 인연으로 송시열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1759년(영조 35)에는 영조가 현판을 써서 내려 주었으며, 1871년(고종 8)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가 수록된 『간이집(簡易集)』 권6 초미록(焦尾錄)의 소서(小序)에서 “소싯적에 지은 잡기(雜記)를 거의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리고는 그중 10분의 1만 남겨 이름을 ‘초미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뒤에 병화(兵火)를 당했으면서도 그 분량이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도 어쩌면 우연의 소치(所致)인지 모르겠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는 1573년 도봉서원이 창립된 이후부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봉서원 설립 초기 서원의 앞날을 축원한 한시이다.

[구성]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는 8구의 칠언 율시이다. 1구와 2구에서는 도봉서원의 이름과 위치를 말하고 있으며, 3구와 4구에서는 서원 주변의 경관을, 5구와 6구에서는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의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에서 ‘미위(微危)’를 따와 조광조를 모신 곳이므로 후학들에게 학문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으며, 끝으로 7구와 8구에서는 도봉서원이 주희(朱熹)의 무이정사(武夷精舍)와 같은 훌륭한 곳이 될 것이라는 기원을 하고 있다.

[내용]

榮辱新規與舊基(영욕신규여구기)[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道峯終覺設名奇(도봉종각설명기)[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巖巖秀色當空聳(암암수색당공용)[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活活寒流不暫衰(활활한류불잠쇠)[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揭妥前賢森陟降(게타전현삼척강)[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藏脩後學謹微危(장수후학근미위)[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幔亭異迹輸精舍(만정이적수정사)[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今見吾東一武夷(금견오동일무이)[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를 보겠도다]

[특징]

운자는 ‘지(支)’ 운의 ‘기(基)’[1구)] ‘기(奇)’[2구], ‘쇠(衰)’[4구], ‘위(危)’[6구], ‘이(夷)’[8구]이다.

[의의와 평가]

「차운하여 도봉서원에 제하다」도봉서원이 설립된 초기에 지어진 시로,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을 주희가 강학하던 무이정사에 비유하여 도봉서원에서 강학하는 후학들에게 수신과 치국의 학문에 힘쓰기를 부탁하고, 아울러 도봉서원이 무이정사처럼 훌륭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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