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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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서울특별시 도봉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각지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도봉 지역 출신으로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자로는 윤희섭(尹喜燮)이 있는데, 188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농민 출신이었다. 윤희섭은 1907년 군대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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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호는 산초(山草). 부인은 1930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함성」, 「창백한 안개」, 「벽오동 심은 뜻은」, 「민비」, 「낙화암」, 「이조의 여인들」 등을 발표한 소설가 장덕조(張德祚)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1. 일제 강점기 박명환(朴明煥)[?~1970]의 활동은 크게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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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 5동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소중한 꿈을 키우며 날마다 행복한 어린이’라는 교육 지표 아래 실력을 쌓으며 꿈을 키우는 어린이,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린이,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어린이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교훈은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착한 일에 앞장서자’이다. 1930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창동 보통학교로 개교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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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가. 아버지는 이각범(李珏範)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이각범은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사무소의 고원(雇員)과 삼수군청의 서기 등을 전전하다가 이재유가 20살인 1924년에 사망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이재유가 3살 때 병사하였다. 이재유는 할아버지 이계남(李啓南)과 할머니 이씨와 같이 살았다. 1. 유년기-청소년기 이재유(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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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지역에 공장을 설립한 방적 회사. 조선대화방적 주식회사(朝鮮大和紡績株式會社)는 1942년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설립된 회사이다. 해방 직후 조선대화방적 주식회사 공장의 설비 상황을 보면, 직기 150대만을 보유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방 이전까지 직포 부문에서만 조업이 이루어진 회사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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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2동의 행정을 관할하는 기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창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양곡 창고가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으며, 창2동은 창동이 창 1동과 창2동으로 분동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봉구의 창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였다가, 1963년 1월 1일에 법률 제1172호와 서울특별시 조례 제274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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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3동의 행정을 관할하는 기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창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양곡 창고가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으며, 창 2동은 창동이 창 1동과 창 2동으로 분동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봉구의 창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였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었고, 1970년 5월 5일에 창동에서 쌍문동이 분리 신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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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4동의 행정을 관할하는 기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창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양곡 창고가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으며, 창 2동은 창동이 창 1동과 창 2동으로 분동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봉구의 창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였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었고, 1970년 5월 5일에 창동에서 쌍문동이 분리 신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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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5동의 행정을 관할하는 기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창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양곡 창고가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창동리’라고 음각된 석조 이정표가 창동 초등학교 옆 공터에 옛날부터 세워져 있었으나 오랜 풍화 작용으로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서울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석조 이정표가 서울의 명소 600선 중 267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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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속하는 법정동. 도봉구가 관할하는 4개 법정동 가운데 하나로 행정동인 창 1동, 창 2동, 창 3동, 창 4동, 창 5동을 관할하고 있다. 조선 시대 이 지역에 양곡 창고가 있어서 창동(倉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창동 초등학교 옆 공터에 옛날부터 ‘창동리’라고 음각된 석조 이정표가 방치되어 있었는데, 풍화 작용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것을 서울 육백년 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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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발견된 미이라. 창동리 미이라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발견된 미이라로서 1943년 1월 말 조선 대화 방적 회사(朝鮮大和紡績會社)가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1-5번지에 연고가 없는 묘지를 정리하던 중 발견하였다. 창동리 미이라는 신장이 182.6㎝가량 되는 큰 키에 성별은 남성이었다. 오른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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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있는 공원. 도봉구청에서는 2016년 4월부터 일제 강점기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동[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 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창동 3사자(獅子) 동상을 건립하고, 기존 도봉구민회관 소공원을 단장하여 창동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였다. 한편 2016년 노곡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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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의 세 마리 사자란 일제 강점기 말 부일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은둔하였던 김병로(金炳魯), 정인보(鄭寅普), 송진우(宋鎭禹)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1931년 9월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7월에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점차 전면적인 전쟁으로 치달아갔다. 식민지 조선은 대륙 침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