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창동의 세 마리 사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007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류정선

[개설]

창동의 세 마리 사자란 일제 강점기 말 부일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은둔하였던 김병로(金炳魯), 정인보(鄭寅普), 송진우(宋鎭禹)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혹했던 1930년대]

1931년 9월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7월에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점차 전면적인 전쟁으로 치달아갔다. 식민지 조선은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가 되어 인적·물적 자원이 모두 전쟁에 동원되었다. 특히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전선에 투입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자, 자칫 총부리를 자신들에게 돌릴 수도 있는 조선인들을 완전히 일본인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소위 ‘황민화’ 정책이라고 하여 ‘황국 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고, 창씨개명,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하게 하는 등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 천황의 ‘황국 신민’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인 지도층을 회유하거나 협박·탄압하여 친일화하고, 이들에게 강연회·라디오 방송·신문 등을 통하여 전쟁 협력과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 신민을 선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자 하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항일 투쟁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협조를 거부한 채 시골로 낙향하던지 서울 인근으로 옮겨서 사회에서 완전히 은둔하게 된 인사도 많았다.

[일제 강점기 말, 은둔지로서의 창동]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가인(街人) 김병로가 이주한 이후에 민족 지도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곳은 북쪽으로는 도봉산(道峰山)이 위치해 있고,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우이천(牛耳川)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 지형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당시에 한적한 시골 마을이면서도 동시에 경원선(京元線)창동역(倉洞驛)이 있어서 경성(京城)을 오가기에 힘들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 민족 지도자들이 시국이 불안해지자 경성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어수선한 경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둔지로서 창동을 선호하게 되었다. 특히 변호사로서 수많은 민족 운동가들을 변론하고 신간회(新幹會)의 중앙 집행 위원장까지 역임한 김병로가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이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이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병로의 이주 이후에 고하(古下) 송진우,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위당(爲堂) 정인보 등이 연이어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이들의 거주지에 유진태한용운(韓龍雲), 안창호(安昌浩) 등 여러 지도자들이 찾아오면서 이곳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독립을 염원하는 거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일제에 요시찰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창동에 거주하면서 양주 경찰서에 고등계가 설치되었고, 창동 주재소에는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전쟁 말기에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이들 중 일부는 창동을 떠나 아예 시골로 낙향하기도 하였다. 창동에 거주한 인사들 중 특히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를 가리켜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고 부르며, 이들의 높은 지조를 기렸다.

[국학자 정인보]

1. 독립운동가이자 학자로서의 활동

위당 정인보의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조선 명종대 대제학 정유길(鄭惟吉), 철종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등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189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례원 부경·호조 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사망 후에 홀로 있을 노모를 위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 연희 전문학교·협성 학교(協成學校)·불교 중앙 학림(佛敎中央學林)·불교 전문학교·이화 여자 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동아 일보』·『시대 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인보는 실학과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며 연구를 하였고, 우리나라의 고전을 대중에 알리는 작업에도 노력하였다.

2. 국학을 지키려 창동에 오다

정인보는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각종 황민화 정책이 추진되고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1940년에 창동으로 이사를 하여 은거하면서 김병로, 송진우 등과 교류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정인보창동 옛집 터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3-4번지에 있었으며, 현재는 도봉구 쌍문 2동 587번지이다.

해방을 맞이하자 상경하여 『조선사 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고, 1947년에 국학 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하여, 국학 발전과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48년에 대한민국 수립 후 감찰 위원장이 되었지만, 1년 후에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인 7월 31일에 서울에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법조인 김병로]

1.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론과 신간회 활동

1887년 전라도 순창에서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김병로는 191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 유학을 하여 니혼[日本] 대학, 메이지[明治] 대학, 주오[中央] 대학 등지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5년에 귀국하여 경성 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조교수로 강단에 서다가 1919년부터 부산 지방 법원 밀양 지원 판사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1년 만에 판사를 사임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주로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무료로 변론하였다.

1930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김병로가 맡았던 주요 사건으로는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 정의부(正義府)·연통제(聯通制)·광복단(光復團)·김상옥(金相玉) 사건, 각지의 독립 만세 사건,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 운동, 원산 노조 파업 사건, 조선 공산당 사건과 간도 공산당 사건 등이 있었다. 1927년에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929년 7월 1일의 전국 복대표 대회(全國複代表大會)에서 조사 부장 겸 회계로 선출되었으며, 1930년에는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 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광복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2. 창동에서 닭을 치다

도봉구 창동에는 1934년에 이주하였다. 김병로는 이곳에서 대지도 사고, 집도 짓고, 3,000여 평의 논도 마련하여 본격적인 농촌 생활에 들어갔다. 해방 2년 전에 1,500마리나 되는 양계도 했지만, 닭 사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본 관리들에게 청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닭을 전부 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김병로의 옛집 터는 당시 주소로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1번지였는데, 현 주소로는 도봉구 쌍문동 731-43번지 창희 빌리지이다.

김병로는 해방 후, 한국 민주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1946년에는 남조선 과도 정부 사법 부장을 지냈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법원장으로, 1953년에는 제2대 대법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에 70세의 나이로 정년 퇴임하였다. 대법원장 재임 당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데에 노력하여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고, 1964년에 사망 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언론인 송진우]

1. 『동아 일보』를 위한 투쟁

송진우의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송희경(宋希璟)의 19세손으로, 아버지 송훈(宋壎)과 어머니 남원 양씨(梁氏) 사이에서 다섯째로 태어났다. 1911년에 메이지 대학에 입학한 후, 조선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았고,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6년에 김성수와 함께 중앙 학교를 인수하여 학감·교장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에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에 경성 복심 법원 판결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다. 1921년 동아 일보사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주필 등으로 『동아 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 농민 본부에서 보낸 3·1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 일보』가 제2차 무기 정간을 당하는데,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부터 복역하였고, 이듬해 2월에 일본 천황 즉위 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 1939년 12월에 조선 총독부로부터 『동아 일보』의 자진 폐간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 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귀국 도중 구속되어 다시 폐간을 강요받았고, 결국 같은 해 8월에 『동아 일보』는 강제 폐간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 조선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 협력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945년 8월 11일에 일본 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거부하였다.

2. 창동에서의 은둔과 피살

송진우는 중일 전쟁이 한층 격렬해진 1938년에 김병로를 좇아 도봉구 창동으로 이주하였고 해방까지 거주하였다. 송진우의 옛집 터는 당시 주소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1번지였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옛집이 남아 있었으나 재개발로 인하여 헐리고 현재는 창 5동 주민 센터 앞에 있는 공터로서 삼풍 유치원의 자연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민주당이 결성되자 송진우가 수석 총무로 추대되었다.

1945년 12월 1일에 『동아 일보』가 복간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2월 28일에는 신탁 통치 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 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 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임시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고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오전 6시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도봉구의 현대사 인물 정책]

도봉구는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고 불렸던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비롯하여 많은 근현대사 인물들이 거주하였던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그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대신 도봉구청에서는 ‘도봉 역사 문화길’의 제7코스로서 ‘도봉 현대사 인물길 코스’를 개발하여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살던 곳을 탐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2017년 이들을 기리기 위해 도봉구민회관 옆 에 창동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창동의 세 마리 사자 동상을 세웠다.

도봉 현대사 인물길은 창동역 → 창동역 터 → 창동 초등학교홍명희 옛집 터송진우 옛집 터김병로 옛집 터정인보 옛집 터문예봉 옛집 터함석헌 옛집전태일 옛집 터계훈제 옛집 터김수영 시인 옛 본가도봉역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도봉구에서는 함석헌의 옛집에 함석헌 기념관을 건립하고, 전태일의 집터 옆에 기념 공원을 조성하는 등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발굴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이 진행 중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15 현행화 [도봉구의 현대사 인물 정책] 도봉구는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고 불렸던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비롯하여 많은 근현대사 인물들이 거주하였던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그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대신 도봉구청에서는 ‘도봉 역사 문화길’의 제7코스로서 ‘도봉 현대사 인물길 코스’를 개발하여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살던 곳을 탐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2017년 이들을 기리기 위해 도봉구민회관 옆 에 창동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창동의 세 마리 사자 동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