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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35
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전쟁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6월 26일 - 북한군 의정부~문산 선 돌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6월 27일 -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수유리에서 전사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 - 6·25전쟁 종결
발생|시작 장소 6·25전쟁 - 서울특별시 도봉구
종결 장소 6·25전쟁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전쟁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은 조선인의 힘만으로 달성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남한과 북한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통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자생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이래로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고, 양국의 원심력이 강해짐에 따라 남한과 북한은 통일 국가 수립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1948년 남과 북에는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분단 국가가 수립되면서 전쟁의 씨앗이 자라나게 되었다. 1948~50년 남한과 북한은 38선에서 잦은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면서 적대감을 키워가게 되었고,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통한 무력 통일을 추구하였다.

[경과]

개전 초기 북한군의 주공 제1군단과 조공 제2군단의 작전은 서울 점령에 목표가 맞춰져 있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연천·운천~의정부~서울에 이르는 주공선과 개성~문산~서울에 이르는 조공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의정부~문산 선을 방어하기 위해 한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은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탄약과 식량보급 등의 문제로 인하여 북한군 저지에 실패하였다.

북한군은 6월 26일 의정부~문산 선을 돌파하자 27일 새벽 4시부터 남침을 재개하여 퇴계원~창동~봉일천 등 3개 방향으로 주공을 지향하였다. 당시 의정부지구 전투 사령관에 임명된 제7사단장 유재흥(劉載興) 준장은 의정부로 투입된 전력으로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우이동]~수락산[상계동] 선의 구릉 지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계획하고 철수 부대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27일 오전 10시경 한국군의 각 부대는 미처 방어 진지를 편성하기 전에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증강된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방어 부대는 포병 학교 제2교도 대대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전력을 다하였지만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1연대장 함준호(咸俊鎬) 대령이 수유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창동선 저지에 실패한 한국군 병력은 미아리, 태릉 일대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미아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기 투입된 제5사단 이응준(李應俊)과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정릉~미아리~청량리 고지를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하고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27일 밤,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급습한 북한군의 전차 공격을 막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진이 가능해질 때까지 남한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전선을 경계로 남한군과 미군이 수세에 몰려 있을 당시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라는 유명한 명령을 남긴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미 8군 사령관도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도봉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자신과 함께 참전한 아들 샘 S. 워커(Sam Sims walker) 대위의 은성 무공 훈장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의정부[지금의 서울특별 도봉구 도봉동]로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결과]

UN군의 북진과 중공군의 참전 그리고 이어진 남진으로 이해 가장 많은 상처와 피해를 입은 것은 도봉의 민간인들이었다. 양측이 도봉을 번갈아 점령할 때마다 주민들은 납북되거나 혹은 부역자로 처벌받아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발생하였다. 학교는 대개 휴교령이 내려진 채 군대의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었고, 전통 가옥들은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의 상처는 사람에게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1573년(선조 6) 조광조(趙光祖)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도봉 서원의 향사가 정지되었다. 도봉 서원은 이미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한 차례 훼철된 바 있으나, 1903년부터 지역 유림들이 제단을 정비하고 춘추 향제를 올렸는데, 6·25전쟁으로 인해 다시 그 기능이 중지되었다. 다행히 도봉 서원은 1970년대 초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의 활약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6/25 수정 요청을 했는데 30일이 넘게 답변이나 수정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민원은 수정증보를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창동-미아리 전투(1950.06.25.~1950.06.26.)에는 국군 제5, 7, 수도사단, 북한군 제3, 4사단이 참여하였습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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