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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298
한자 京畿道
이칭/별칭 근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방 행정 구역

[정의]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관할하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경기도(京畿道)는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속해 있었던 곳이다. 구체적으로는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해등촌면(海等村面) 일대가 도봉구에 해당하였다. 본래 경기(京畿)는 왕도(王都)와 그를 둘러싼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경(京)’은 천자의 거주지가 있는 곳이며, ‘기(畿)’는 그를 둘러싼 지역을 가리킨다.

『주례(周禮)』에서는 ‘기’를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1,000리 이내의 땅”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당(唐)을 거치면서 ‘경기’는 왕도를 제외한 왕도의 주변 지역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당나라는 왕도의 주변 지역을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 범위는 『주례』의 규정보다 축소된 것이었으며 왕도는 제외되었다. 경기의 명칭이 우리 역사에서 처음 나타난 때는 고려 시대이다. 995년(성종 14) 개경 주변에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을 설치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이를 묶어 왕도의 외곽 지역을 경기라 지칭하였는데, 이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례를 살펴보면, 경기는 본래 왕도와 그 주변 지역을 뜻하는 용어로 국가의 중심이 되는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 그 규정에서 왕도가 제외되면서 왕도의 주변 지역을 뜻하는, 가치 중요성이 조금은 퇴색한 단어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왕성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그를 둘러싼 지역인 경기 또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수차례의 개편을 거치며 전국을 8도 체제로 편제하고 각 도(道) 아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를 통해 군현 아래의 촌락에 이르기까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경기는 그 나름의 유래를 지닌 용어이지만, 조선 초 경기도의 설치는 지방 편제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경기도에 관한 기록은 지리지류에서 자세하게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리지로서 경기도에 대해서도 역사, 행정 구역, 지리적 특성, 규모, 시설, 특산물, 군사 제도 등 다양하고도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경기도의 인구는 2만 882호에 5만 352명으로, 전답은 20만 347결로 파악되었다. 동서로 약 103.68㎞[264리], 남북으로 약 142.95㎞[364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1개의 목, 8개의 도호부(都護府), 6개의 군, 26개의 현을 설치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속한 양주 지역에는 당시 양주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기도에는 총 38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인구는 15만 9160호에 64만 2069명에 달하였다.

[내용]

조선 시대 경기도 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이었고 한성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경제적 부가 한성과 경기도 지역으로 집중되면서 학문 또한 크게 발달하여 기호(畿湖)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정계를 점차 장악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경기 지역의 낙론(洛論)계 인물들은 조선 후기의 학문적 변화를 선도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속한 양주목 또한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선왕의 능묘 및 주요 서원이 소재하여 유교 왕정의 상징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변천]

고려 시대의 경기는 개경을 둘러싼 지역으로 현재의 경기도와는 관할 구역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정식 행정 구역으로서 하나의 ‘도’로 성립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60년 이후 왜구 방어와 관련된 군사직을 설치하며 도로 점차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에는 처음으로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 체제로 편제하였으며, 1434년(세종 16) 왕도 한성 주변이 경기도로 설정되면서 현재의 구역과 대부분 일치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위치한 지역은 왕도 한성과 그 경계를 맞닿고 있었는데, 도봉구 일부 지역은 성저 약 3.93㎞[10리]로 한성부에 속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현재의 강북구 지역으로 강북구가 분리되고 난 후의 도봉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일대에 해당하였다.

본래 경기도 관찰사의 감영은 수원에 있었지만, 나중에 광주로 옮겨졌다. 1895년 5월 전국을 23부제로 재편하면서 경기도한성부·인천부·개성부의 관할에 속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경기도가 부활되었다. 1910년에는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평택 남부 지역도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서울시가 특별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으며, 1981년에는 인천시가 직할시[현재의 광역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경기도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해당하는 양주목 또한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선왕의 능묘가 다수 조성되고 주요 서원이 자리 잡음에 따라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이 주목되었다. 이는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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