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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299
한자 楊州牧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466년연표보기 - 양주도호부에서 양주목으로 승격됨
개정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양주목에서 양주군으로 변경됨
성격 지방 행정 구역

[정의]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양주목(楊州牧)은 조선 시대 경기도에 속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관할 구역에 해당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 일대가 현재의 도봉구 지역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각 도(道) 아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를 통해 군현 아래의 촌락에 이르기까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조선 초 양주목의 설치는 이러한 지방 편제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관련 기록]

양주목이 설치된 때는 조선 초의 일이지만, 양주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 시대부터 주목되어 왔다. 특히 수도를 한성에 정한 조선 시대에 와서는 중요성이 더욱 커져 각종 지리지와 지도류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연대기 사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에서 양주목에 대한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양주목에 관한 인식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양주목에 대한 지리지의 기록을 통해 구역과 인구의 역사적 변천 또한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리지로서 역사, 지리적 특성, 규모, 시설 등 양주목[당시는 양주도호부]에 관한 기록도 매우 상세하다. 이 책에서 서술한 양주목의 역사 등은 이후에도 계승되어, 1530년(중종 25)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18세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이후 편찬된 지리지에서도 모두 그 기록을 바탕으로 양주목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중 양주목의 행정 구역에 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을 보여 주는 기록은 『여지도서』인데, 이에 따르면 양주목의 관할 면은 읍내면(邑內面)·해등촌면·노원면(蘆原面) 등 총 34개이었고, 1만 1363호에 5만 255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며, 전답은 총 1만 160여 결에 달하였다. 이러한 수치를 종합해 보면 당시 양주목은 전국적으로도 큰 규모의 고을로 꼽혔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1,481호에 2,72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에 비하면 호구 파악 방식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양주목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인 해등촌면이 속해 있던 경기도의 행정 구역으로, 수도 한성에 가까운 교통의 요충지로 상업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상업을 일삼아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며 이권을 독점하여 지방관들이 다스리기 어려워하는 지역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정적인 인식이라기보다 농업을 근본으로 한 조선 시대에 상업이 발달한 양주의 한 특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땅이 기름지다고 하였던 데 비해, 『여지도서』에서는 농업을 일삼는다면서도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기 때문에 장사와 수공업도 즐겨 종사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를 거치며 양주목이 상업적으로 크게 발달하였던 모습을 보여 준다. 후기에 이르면 양주목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곳으로 꼽히기 시작하였는데,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해 역대 왕의 능묘가 다수 양주에 조성된 것도 그러한 인식의 이유 중 하나이었다. 또한 도봉 서원(道峯書院), 석실 서원(石室書院) 등 사림의 상징적인 서원이 위치한 곳으로 조선 후기 학문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변천]

조선 시대의 양주목은 고려 시대 견주의 옛 치소(治所)에 관아가 두어졌기에 견주의 후신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 명칭상으로는 고려 시대의 양주, 즉 남경(南京)의 후신이며, 영역적인 측면에서는 고려 시대의 남경[양주] 영역 중 조선 시대 한성부의 영역으로 포함되지 못한 지역, 그리고 견주·풍양현·사천현 등의 영역으로 새롭게 구성된 고을이다.

원래 양주는 1394년(태조 3) 한양(漢陽) 천도와 함께 새로이 영역을 편성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 광진구 지역에 해당하는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그 치소를 두었으나, 1397년(태조 6)에 옛 견주의 터인 현 양주시 유양동 일대로 옮겼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여지도서』에는 목으로 승격한 것이 1410년(태종 10)이라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한성부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행정 구역을 재편하면서 다시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이후 계속된 행정 구역 변화로 1963년 일부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속하였다. 1973년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신설되자 옛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은 현재 도봉구에 속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양주목은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선왕의 능묘가 다수 조성되고 주요 서원이 자리 잡으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성이 주목되었다. 이는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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