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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등촌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00
한자 海等村面
이칭/별칭 해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해등촌면이 노해면으로 통합되면서 폐지됨
개정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해등촌면과 노원면이 노해면으로 통합됨
성격 지방 행정 구역

[정의]

조선 시대부터 1914년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개설]

해등촌면(海等村面)은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의 34개 속면(屬面) 가운데 하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지방 행정 체계로서 면(面)은 이미 고려 말부터 등장하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정비되어 성문 법전을 통해 규정되는 때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은 각 도(道) 아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를 통해 군현 아래의 촌락에 대해 국가가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해등촌면이 지방 행정 단위로 편제되고 지리지 및 각종 기록에 나타나는 것 또한 해당 지역이 확고하게 중앙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관련 기록]

1530년(중종 25)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양주목 역원조의 기록에서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해촌이 곧 해등촌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덕해원누원점(樓院店)으로 추정된다. 1765년(영조 33)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해등촌면이라는 명칭이 명확하게 등장하는데, “남쪽으로 관아와 가장 가까운 곳은 30리, 가장 먼 곳은 50리”라고 하였으며, 거주하는 인구는 379호에 1,552명으로 당시 양주목의 34개면 중에서는 중간 정도의 규모에 해당하였다.

역시 18세기 후반의 자료인 『호구 총수(戶口總數)』에서는 해등촌면 내에 영국리(靈國里)·누원리(樓院里)·암면리(巖面里)·소라리(所羅里)·우이리(牛耳里)·마산리(馬山里)·각심리(覺心里) 등이 있고, 총 448호에 1,52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양주목의 관할 면 중에서 중간 규모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해등촌면의 위치에 관한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정조 대의 기록을 후대에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양주군 읍지(楊州郡邑誌)』[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 경계가 “주 남쪽 30리에서 50리까지”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 또한 이와 일치하여 남쪽으로 30리에서 50리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 각종 지리지 및 지도류에서도 해등촌면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내용]

해등촌면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의 관할 구역이었다. 인구수로 추정해 볼 때 해등촌면은 중간 규모 정도의 면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단순 인구수로만 추정할 수 없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1573년(선조 6년) 해등촌면 영국리 지역에 도봉 서원(道峯書院)이 세워졌는데, 이는 기묘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여 사액을 받았을 만큼 사림 세력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따라서 1696년(숙종 22)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이 병향(竝享)되었을 때,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송시열의 도봉 서원 배향 논쟁이 계속된 바 있다. 또한 도봉 서원이 위치한 도봉 계곡 근처에는 당대의 유력자들이 방문하여 바위에 글씨를 새기곤 하였다.

해등촌면에는 누원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수도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가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여 조선 초부터 역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수도 한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해등촌면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변천]

해등촌면이 어느 시기에 양주목의 관할 면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명확하게 알기 어려우나, 조선 초 지리지에서부터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 늦어도 여말 선초에는 양주목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명칭은 해등촌면 주위에 흘렀던 소군내라는 하천의 물이 마치 바닷물처럼 깨끗하여 해등천(海等川)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듯하다.

해등촌면은 조선 시대에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노원면(蘆原面)과 통합되어 노해면(蘆海面)으로 개칭되었다. 통합된 이후에도 노해면은 계속 양주에 속하였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하였다. 1973년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신설되자 옛날 해등촌면 지역은 현재 도봉구에 속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해등촌면은 인구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지정학적 위치와 도봉 서원누원점 따위가 설치되는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각종 지리지 및 지도 등에 상당수 등장한다. 이러한 배경과 자료 등은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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