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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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登 |
이칭/별칭 | 계천위(啓川尉),개성군(開城君),계천군(啓川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출생 시기/일시 | 1379년 - 이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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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457년 - 이등 사망 |
묘소|단소 | 이등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5 |
성격 | 인척 |
성별 | 남 |
본관 | 개성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태조 이성계의 사위.
[가계]
본관은 개성(開城). 개성 이씨의 시조는 고려 충숙왕 대의 이차감(李次瑊)으로, 청주 이씨로부터 분적하여 개성에 정착하였다. 이차감의 손자이자 이등의 아버지인 이덕시(李德時)[이개(李開)로 개명]는 고려조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바 있다. 따라서 후손들이 이개를 일세조로 하고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활동 사항]
이등(李登)은 태조의 서녀(庶女)인 의령 옹주(宜寧翁主)와 혼인하였다. 의령 옹주는 태조의 총희인 찬덕 주씨(贊德周氏) 소생으로 비록 천출이기는 하나 태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등의 아버지 이개가 개국공신이기도 하였으므로 이등 또한 태조와 왕실로부터 아낌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이등이 장군에 임명되자 그가 내료(內僚)[궁중에서 잡무를 처리하는 벼슬아치] 출신이라 하여 당시 장군방(將軍房)의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회좌례(會座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회좌례를 통해 적임 여부를 판단해야 새로 제수된 자들이 직무를 행할 수 있었기에, 이는 이등을 적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자 정종이 장군방을 혁파하였다.
또한 1405년(태종 5)에는 이덕시가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들었다 하여 강화도에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이등이 판결을 잘못한 것이라 하여 신문고를 쳤다가 사헌부에게서 탄핵을 받았는데, 태종은 이를 듣지 않고 이등을 용서하였다. 1419년(세종 1)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은 딸을 이등의 아들 이선(李宣)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후 이등이 가난하다 하여 사절하였다가, 세종의 명으로 하옥당하기도 하였다.
1422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며, 1435년 계천군(啓川君)에 봉해졌다. 1450년(문종 즉위년) 종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계천위(啓川尉)가 되었다. 1439년에는 넷째 아들 이효(李宯)가 계집종과 사통한 일로 파직당하였다. 1457년(세조 3)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착하고 부지런하여 만년에도 항상 조알(朝謁)의 예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의령 옹주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다.
[묘소]
무수골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1978년 건립된 ‘개성 이씨 선조 사적비(開城李氏先祖事蹟碑)’가 있는데, 이 사적비 뒤로 올라가면 계천위 이등의 묘역이 나온다. 묘역에는 상측과 하측에 두 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의 것이 이등의 묘이고, 아래가 의령 옹주의 묘이다. 이등의 묘는 묘비·상석·문인석 등의 옛 석물과 근래 세워진 향로석을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장방형의 석재로 네모꼴의 호석을 둘러 여말 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묘비에는 ‘계천위 시 호안공 이등지묘(啓川尉諡胡安公李登之墓)’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