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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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定王后 |
이칭/별칭 |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천축사와 관련된 조선 전기의 왕비.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조선 중종의 계비(繼妃)로 파산 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과 전성 부부인(全城府夫人) 이씨(李氏)의 딸이며,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의 누나이다.
[활동 사항]
1515년(중종 10)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가 원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문정왕후(文定王后)는 1517년 17세의 나이로 계비로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1534년(중종 29) 경원 대군(慶源大君)[명종]을 낳았다.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12살에 친아들인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외척들 간의 정쟁으로 혼란하였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와 윤원형은 소위 소윤(小尹) 일파로서 장경왕후의 오빠로 대윤(大尹)이라 일컬어진 윤임(尹任) 일파와 오래도록 대립하였는데, 결국 명종 즉위 직후 을사사화를 통해 윤임을 사사하였다. 1546년에는 윤원형과 대립한 윤원로를 사사시켜 친족을 죽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553년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며 윤원형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를 부흥시키는 정책을 행하기도 하였다. 1550년(명종 5)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였고,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켰다. 천축사(天竺寺)에 화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을 헌납하여 불좌(佛座)를 만들도록 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가 헌납한 이 화류수목조용상은 현재 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한 천축사 대웅전 안에 보존되어 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난 후, 문정왕후의 불교 부흥 정책은 곧바로 여러 관료들의 공격을 받았다. 보우 또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인해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묘소]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泰陵)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해 있다. 본래 문정왕후는 중종의 정릉(靖陵)을 봉은사 곁으로 옮긴 후 자신도 이곳에 묻히려 하였으나, 지대가 낮아 지대를 높이는 작업을 하는 도중 사망하여 결국 태릉에 따로 묻히게 되었다. 태릉은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둘렀고, 각 석물(石物)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에 따라 조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문정왕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