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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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成皇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의 천축사에 시주한 조선 시대 고종의 왕비.
[개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1851~1895]는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왕비이다. 1891년(고종 29) 상궁 박씨와 김씨 등이 비로자나 삼신불도를 천축사에 시주하여 명성황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또한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감고당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왔다가 다시 경기도 여주로 이전하기도 하는 등 도봉구와 관련을 맺고 있다.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명성황후는 고려 말 충렬왕, 충선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명신 민종유(閔宗儒)의 후손이다. 이 가문에서는 세종 대 개성부 유수(留守) 민심언(閔審言), 명종 대 좌찬성(左贊成) 민제인(閔齊仁), 숙종의 장인으로서 노론 척신이었던 민유중(閔維重) 등 명신이 잇달아 나왔다. 민유중의 딸인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명성황후에게 5대조이다. 18세기 영조·정조 대에 들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순조 때 개성 유수를 지낸 민기현(閔耆顯)이고, 아버지는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을 지낸 민치록(閔致祿)이다.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아들은 조선 제27대 왕인 순종이고, 며느리는 순명효 황후이다.
[활동 사항]
1. 성장 및 왕비 간택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은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할아버지의 벼슬 덕에 음서로 겨우 출사를 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게다가 명성황후가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고단하게 살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관심이 많아서 남자 선비에 못지않은 유교적 경륜과 소양을 쌓았다.
명성황후의 집안에 대를 이을 남자가 없어서 민치구(閔致久)의 아들 민승호(閔升鎬)가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민치구의 딸이자 민승호의 친남매였는데, 이들이 고종의 왕비 간택 시 황후를 적극 추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외척의 세도를 경계하였던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집안이 몰락하여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여겨 그를 간택하였다. 이에 따라 1866년(고종 3) 음력 3월 20일 명성황후는 고종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2. 정치 활동
그러나 세자 책봉 문제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명성황후가 1874년 이척(李坧)[순종]을 낳으면서 세자 책봉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후 개화를 둘러싼 노선 차이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무리한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 실정을 거듭하여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명성황후가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강력한 근왕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민씨 일족을 중용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달리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1876년 일본과의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1881년 일본에 신사 유람단,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는 등 해외 문물의 유입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많은 민씨 일족이 죽거나 다쳤고, 명성황후도 가까스로 피신하였다. 이때를 틈타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청군(淸軍)에 의해 청나라로 압송되고 권력은 다시 고종에게 넘어왔다. 권력에 불안을 느낀 명성황후는 민씨 일파를 더욱 중용하였다. 1884년에는 청의 개입 이후 더뎌진 개화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은 또다시 청이 개입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동시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의심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며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게 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침략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20일]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곧 을미사변이다.
3.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불도 및 감고당
명성황후와 도봉구의 인연으로는 천축사의 비로자나 삼신불도 및 감고당을 들 수 있다. 도봉산 만장봉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인 천축사의 대웅전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으로 비로자나 삼신불도와 지장 탱화·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비로자나 삼신불도의 오른쪽 하단 시주질(施主秩)[시주한 사람 명단]에 명성황후의 건강과 만수무강[玉體恒安, 聖壽萬歲]을 기원하기 위해 1891년(고종 29) 상궁 박씨와 김씨 등이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로자나 삼신불도는 왕실 불화의 격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세자인 순종의 건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전국의 명산대찰에 시주하고 복을 빌었다. 도봉산 천축사 등도 비록 기록은 없지만 역시 명성황후가 상궁 등을 통해 시주했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종로구 안국동 덕성 여자 고등학교 본관 서쪽에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 덕성 여자 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겨졌고, 2006년 쌍문 고등학교가 신축되면서 경기도 여주 생가 옆으로 옮겨졌다.
[묘소]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청량리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가 1919년 고종 승하 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는 이후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아관 파천 이후인 1896년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고종 34)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이 치러지고, 1897년 10월 12일 대한 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 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 명성 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