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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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淳 |
이칭/별칭 | 화숙(和叔),사암(思庵),청하자(靑霞子),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523년 - 박순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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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0년 - 박순 진사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589년 - 박순 졸 |
출생지 | 박순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시 |
거주|이주지 | 박순 은거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
묘소|단소 | 박순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716-1 |
사당|배향지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사당|배향지 | 옥병 서원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
사당|배향지 | 월정 서원 - 전라남도 나주시 |
사당|배향지 | 월봉 서원 - 광주광역시 |
사당|배향지 | 화곡 서원 -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충주(忠州)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에 배향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청하자(靑霞子). 증조할아버지는 은산 군사(殷山郡事) 박소(朴蘇)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 사 박지흥(朴智興)이다.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목사(牧使) 박상(朴祥)의 동생 박우(朴祐)이고,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다.
[활동 사항]
박순(朴淳)[1523~1589]은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1561년(명종 16) 홍문관 응교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의논할 때 그의 주장이 임백령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실권자 윤원형(尹元衡)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본향(本鄕)인 나주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복직되었다. 1565년(명종 20)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이후 의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72년(선조 5)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하였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선조 12) 영의정에 올랐다. 박순은 중앙 정계에서 요직을 두루 지내며 사림을 적극적으로 천거하여 사림 정치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이(李珥)를 구호하다 삼사의 탄핵을 받으며 서인의 영수로 몰리기도 하였다.
박순은 도봉 서원을 창건한 남언경(南彦經)과 함께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그 자신 도봉 서원에 자주 출입하였다. 박순은 도봉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는 세도 정치(世道政治)의 흐름 중간에 선 인물이었다. 박순은 사림을 골고루 등용하고 사림 정치를 확립한 세도 명상(名相)으로서, 만년에는 영평(永平)[현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또한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저서로 『사암집(思庵集)』 7권이 있다. 박순은 후사(後嗣)가 없고 또 사후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글이 정리될 틈도 없이 흩어졌는데, 60여 년이 지난 1652년(효종 3) 외손들이 흩어졌던 글을 모아 발간한 것이 『사암집』으로, 시(詩)가 주종을 이룬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도봉 서원과 나주의 월정 서원(月井書院), 광주의 월봉 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 서원(花谷書院), 영평의 옥병 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