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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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長生 |
이칭/별칭 | 희원(希元),사계(沙溪),문원(文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548년 - 김장생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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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김장생 창릉 참봉에 천거 |
몰년 시기/일시 | 1631년 - 김장생 졸 |
추모 시기/일시 | 1717년 - 김장생 문묘 배향 |
거주|이주지 | 김장생 거주지 - 충청남도 논산시 |
부임|활동지 | 김장생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묘소|단소 | 김장생 묘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
사당|배향지 | 죽림 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
사당|배향지 | 돈암 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
사당|배향지 | 도기 서원 - 경기도 안성시 안성읍 도기리 |
성격 | 학자|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光山) |
대표 관직 | 형조 참판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 출입하였던 학자이자 문신.
[개설]
서인의 이념적 지주로 평가되는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높은 학문 수준 및 교우와 문인들의 활동에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의 정계를 주도하였다. 도봉 서원을 출입하며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로 이어지는 서인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도봉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송시열(宋時烈)이 제자이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1526~1582]이며, 어머니는 우참찬을 지낸 신영(申瑛)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아들은 김집(金集)[1574~1656]이다.
[활동 사항]
김장생은 13세부터 송익필에게 『근사록(近思錄)』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20세 이후에는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31세인 1578년(선조 11) 창릉 참봉으로 추천을 받아 관직을 시작하였고, 정철(鄭澈)·조헌(趙憲)과 교류하였다. 55세 때인 1596년(선조 29)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 정권이 조정에서 득세하자 이를 피해 연산(連山)[현 충청남도 논산시]으로 퇴거하였다가 광해군 즉위 후 잠시 회양과 철원의 부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이항복(李恒福)이 광해군에게 김장생을 추천하기도 하였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여 서동생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이 국문을 받자 해직되어 연산으로 돌아왔다.
이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으로 중앙 정계에 다시 나아갔다. 인조반정 이후 반정 공신들은 대부분 김장생과 사우 관계에 있었고, 김장생 역시 반정의 명문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김장생 등의 산림을 초치하는 것은 반정 세력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간 김장생은 입조(入朝)와 낙향(落鄕)을 거듭하였으나, 많은 시간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이·성혼(成渾)·송익필의 문인이었던 김장생은 철학적으로 이이의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따랐다. 이이와 성혼을 위한 서원 건립과 더불어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인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선조 34)에 완성하였다.
1583년(선조 16)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학과 관련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理)의 절대성에 따라 국왕도 같은 예(禮)를 따라야 한다는 김장생의 주장은 효종 사후 2차에 걸쳐서 예송이 진행될 때 송시열의 예론에 철저히 적용되었다. 이이로부터 송시열로 이어지는 김장생의 학문은 도봉 서원의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일가의 묘소인 이곳은 김장생의 묘를 비롯하여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그의 아들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선생(金善生) 등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문인 송시열의 주도로 1687년(숙종 13) 문집이 간행되고, 1717년(숙종 43) 문묘 배향이 이루어졌다. 김장생은 이후 충청남도 논산의 돈암 서원(遯巖書院), 경기도 안성의 도기 서원(道基書院), 충청남도 강경의 죽림 서원(竹林書院) 등 10개 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