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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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廷馣 |
이칭/별칭 | 중훈(仲薰),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충목(忠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541년 - 이정암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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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이정암 식년 문과 병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00년 - 이정암 졸 |
부임|활동지 | 이정암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
부임|활동지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 | 양주 목사 |
[정의]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로 재임하며 도봉 서원을 중수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사직 서령(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김응진(金應辰)의 딸인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이조참판 정형(廷馨)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이정암(李廷馣)[1541~1600]은 18세 되던 1558년(명종 13) 가을 진사가 되었고, 21세가 되던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기도 경차관으로 재해 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선조 5)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연안 부사가 되어 군적(軍籍)을 정리하였다. 1576년(선조 9) 장단 부사가 되었다.
1578년(선조 11) 제용감 정 등을 역임하다가 양주 목사로 나아가 1579년(선조 12) 도봉 서원과 향교를 중수하였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 양주 목사였던 남언경(南彦經)의 발의로 설립이 추진되어 1574년(선조 7)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강당 및 정문이 대강 완성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갖추어지기 전 남언경이 질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이제민(李齊閔)과 이정복(李廷復)이 양주 목사로 부임하여 차례로 서원을 중수하였고, 설립을 추진한 지 6년 만에 이정암의 양주 목사 재임 시절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정암은 양주 목사로 있으면서 도봉 서원 설립뿐 아니라 이 일대의 전안(田案)을 개혁하였으며,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1587년(선조 20) 동래 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직(司直)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에는 승지, 공조참의,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1월 이조참의로 있었고, 4월에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이들과 함께 연안성(延安城)으로 들어가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자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굳게 지켜냈다.
1593년(선조 26) 병조참판과 전주 부윤,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1596년(선조 29)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그 해 12월 지중추부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기복(起復)하라는 명을 받고, 해서(海西)의 초토사로 해주의 수양 산성(首陽山城)을 지켰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풍덕(豐德)의 정주 정사(貞洲精舍)에서 『왜변록(倭變錄)』 등을 지으며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상례초(喪禮抄)』, 『독역고(讀易攷)』, 『왜변록(倭變錄)』, 『서정일록(西征日錄)』, 『사류재집(四留齋集)』 등이 있다. 이정암의 시문은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대부분 유실되었는데, 현손(玄孫) 이여주(李汝柱)가 각고의 노력 끝에 글을 수집하여 1736년(영조 12) 문집으로 간행하였다.
[묘소]
개성부 전포(錢浦) 밖 선영에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연안을 수비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 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