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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56
한자 金繼恭
이칭/별칭 가평군(加平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1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06년연표보기 - 김계공 중종반정 참여
묘소|단소 김계공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1동
성격 내시
성별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1동 곱산 내시 묘역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내시.

[개설]

조선 시대 내시는 동성(同姓)·이성(異姓) 여부와 관계없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을 수 있어 판곡파(板谷派)·계림파(桂林派)·장동파(壯洞派)·강동파(江東派)·서산파(西山派)·과천파(果川派) 등 다양한 종파(宗派)로 분파하였다. 김계공(金繼恭)[?~?]은 판곡파에 속하는 내시인데, 실제의 본관과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활동 사항]

김계공은 조선 왕실의 내시로 활동하면서 성종·연산군·중종을 연이어 모셨다. 조선 시대 내시는 궁에 거주하는 장번 내관(長番內官)과 궁 근처에 거주하며 출퇴근하는 출입번 내관(出入番內官)의 두 유형으로 나뉘었는데,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김계공은 출입번 내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계공은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중종반정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503년(연산군 9) 연산군의 명으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는 기록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이로 미루어 김계공연산군은 결코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계공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중종이 이례적으로 김계공에게 서반(西班) 관직을 제수하였다. 하지만 내시인 김계공을 서반으로 서용한다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환관 정치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조정 신료들의 만류로 결국 중종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519년(중종 14) 김계공조광조(趙光祖) 일파에 의해 유영(柳濚)·이효성(李孝誠) 등과 함께 외람되게 녹권(錄券)을 받은 자로 지목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1동 곱산 내시 묘역에 있다. 조선 시대 내시의 종파 가운데 판곡파 묘역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김계공의 묘표(墓表)와 함께 현종의 내시였던 채이직(蔡以直), 숙종의 내시였던 여기양(呂起陽)의 묘표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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