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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59
한자 徐龍輔
이칭/별칭 여중(汝中),심재(心齋),익헌(翼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57년연표보기 - 서용보 생
활동 시기/일시 1774년 - 서용보 증광 생원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824년연표보기 - 서용보 졸
추모 시기/일시 1824년 - 서용보 익헌(翼獻) 시호 받음
부임|활동지 서용보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대구(大丘)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 일대에서 시회(詩會)를 갖고 『도봉첩(道峰帖)』을 제작한 문신.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여중(汝中), 호는 심재(心齋). 고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장인이던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서명백(徐命伯), 할아버지는 서신수(徐信修)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서유녕(徐有寧)이며, 어머니는 송의손(宋宜孫)의 딸이다.

[활동 사항]

서용보(徐龍輔)[1757~1824]는 18세 되던 해인 1774년(영조 50) 증광 생원시 3등 17위 및 증광시 병과 16위로 소과·대과에 연달아 등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조 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규장각 직각·경기도 관찰사·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순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재상으로서 순조를 보필하는 동안 서용보는 대왕대비인 정순 왕후(貞純王后)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01년(순조 1) 그가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정순 왕후가 서둘러 조정에 복귀할 것을 친히 하교하였다. 이후에도 서용보는 누차 귀향을 도모하였으나 번번이 순조정순 왕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05년(순조 5) 사은사(謝恩使)로서 청나라를 방문하고 귀국한 후에야 비로소 향리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14년 뒤인 1819년(순조 19) 영의정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국정을 총괄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화려한 관력(官歷)을 거치는 동안 서용보이재학(李在學)과 함께 도봉산을 방문하여 시회(詩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도봉첩(道峰帖)』서용보 등이 도봉산에서 개최한 시회를 기념하여 직접 제작한 것으로 도화서 화원 김석신(金碩臣)이 그림을 그렸다.

[상훈과 추모]

서용보가 사망하자 순조가 애석한 마음을 표하며 특명을 내려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장례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사망한 지 두 달 만에 익헌(翼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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