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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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曄 |
이칭/별칭 | 시회(時晦),수몽(守夢),설촌(雪村),문숙(文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향주 |
출생 시기/일시 | 1563년 - 정엽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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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정엽 도봉 서원에서 수학 |
몰년 시기/일시 | 1625년 - 정엽 졸 |
추모 시기/일시 | 1625년 - 정엽 우의정 추증 |
거주|이주지 | 정엽 거주지 - 경기도 여주군 |
수학지 | 정엽 수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경기도 김포시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충청남도 서천군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경기도 수원시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함경북도 종성군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충청남도|충청북도 |
부임|활동지 | 정엽 부임지 - 강원도 양양군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초계(草溪) |
대표 관직 | 좌참찬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서 수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증조할아버지는 찰방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추증된 정희년(鄭熙年)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에 추증된 정선(鄭璇)이다. 아버지는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정유성(鄭惟誠)이고, 어머니는 윤언태(尹彥台)의 딸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은 판서 이산보(李山甫)의 딸이며, 아들 정원석(鄭元奭)과 네 딸을 낳았다. 사위는 이정철(李廷喆)·나만갑(羅萬甲)·유철증(兪哲曾)·이상질(李尙質)이다.
[활동 사항]
정엽(鄭曄)[1563~1625]은 16세가 되던 해인 1578년(선조 11) 혼인하였다. 이후 스승을 찾아 수학하라는 장인의 권유를 받아 송익필(宋翼弼)·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1581년(선조 14)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도봉 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았다. 1583년(선조 16) 별시에서 병과 12위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물러나 삼년상을 치렀다. 상복을 벗은 후 누차 승진하여 관직이 형부원외(刑部員外)에 이르렀다. 1587년(선조 20)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김포 현령을 자청하였으며, 1591년(선조 24) 할머니의 상을 당하자 맏손자로서 삼년상을 치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했을 때 예조정랑으로 재직하던 정엽은 고급사(告急使)로 차출되어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돌아온 직후 수원 부사에 임명되었다. 1602년(선조 35) 정권을 장악한 정인홍(鄭仁弘)이 성혼을 배척하면서 성혼의 문인이던 정엽은 종성 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성주 목사와 홍주 목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충청 감사·예조참의·승지·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조정 내에서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서인(廢庶人)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자 외직을 자청하여 양양 부사가 되었다가 1619년(광해군 11) 파직되어 여강(驪江)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대신의 천거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24년(인조 1)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이괄(李适)의 난을 처리하였다. 그 뒤 대사헌·좌참찬 등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문집(文集)인 『수몽집(守夢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망한 직후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