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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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大運 |
이칭/별칭 | 시회(時會),석담(石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증조할아버지 권상(權常)은 효행으로 『삼강록(三綱錄)』에 이름을 올렸으며,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할아버지 권협(權悏)은 정유재란 당시 명에 고급사(告急使)로 파견되어 원병을 청하기도 하였으며,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아버지 권근중(權謹中)은 회인 현감, 부여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권대운(權大運)[1612~1699]은 허적(許積)과 함께 탁남의 영수로 환국 정국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649년(인조 27)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이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의 청직과 요직을 두루 거쳐 1658년(효종 9) 승지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3월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간청하여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양주 목사로 재직 중 목화 작황이 좋지 않아 포(布)의 가격이 오르자, 포로 상납 받던 각종 세금을 쌀로 대신하여 받을 것을 제안하여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
약 1년 후인 1661년(현종 2) 5월 21일 형조참의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 대사간, 형조판서 등의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영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영의정에 올랐으며,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도록 주청하였다. 이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690년(숙종 16) 당시 원자의 책례를 주관하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해남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고령을 이유로 풀려나 금양(衿陽)[현 경기도 시흥] 지방에서 은거하였다.
[묘소]
부평 과전리에 장사지냈다가 1723년(경종 3) 인천 도정곡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