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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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庭 |
이칭/별칭 | 중번(仲蕃),화음(華陰),무구옹(無求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무구옹(無求翁). 아버지는 사간원 정언을 지낸 이주(李澍)로, 슬하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이다.
[활동 사항]
이창정(李昌庭)[1573~1625]은 12세에 아버지 이주를 여의고 스무 살가량 차이나는 형 이광정에게 의지하여 학문에 힘썼다.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1605년(선조 38) 은율 현감을 시작으로 순천 부사·동래 부사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선치(善治)로 명성을 얻었다. 동래 부사 재임 시에는 왜인들을 신의와 단호함으로써 다루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양주는 한성과 가까워 백성들이 상업을 일삼아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며 이권을 독점하여 지방관들이 다스리기 어려워하는 지역이었다. 이창정은 법에 자애로움을 더하여 이곳을 잘 다스려, 감사가 도내 관리들을 포폄(褒貶)[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때 1등으로 뽑혀 내구(內廐)에서 기르던 말 한 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것을 인정받아 충청 수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명나라 도독 모문룡(毛文龍)과 화목하지 못하여 변방이 소란스러워지자 그 후임으로 추천되어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함경도를 문(文)으로 교화하려 힘썼다. 안변에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