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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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廣敬 |
이칭/별칭 | 공직(公直),추천(秋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다. 어머니는 별좌 한세원(韓世遠)의 딸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부인은 돈령부 도정 민유경(閔有慶)의 딸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슬하에 정지화(鄭至和) 등 4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광경(鄭廣敬)[1586~1644]은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병과 1위로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다시 일어나자 아버지 정창연이 이에 반대하고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자 여러 무리가 죄 주기를 청하므로 정광경이 아버지 대신 참가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화를 입는 등 정국이 어지럽게 되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거나 억지로 나아갔더라도 평소의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궁실을 수치(修治)하는 데 번번이 반대하여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1618년 정청에 참여한 것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당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전주로 피난하였다. 1628년(인조 6) 10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1629년(인조 7) 2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인혐(引嫌)[벼슬아치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느낌]하여 체직되었기에 양주 목사로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후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어 대사간, 강원도 관찰사 등의 관직을 거쳐 성남의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번지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에 있다. 묘역 초입에 동래 정씨 사당인 회현사와 재실인 상덕재가 있다. 정광경의 묘는 묘역 상측 형 정광성의 묘 옆에 있는데, 부인 여흥 민씨의 묘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표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