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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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龜錫 |
이칭/별칭 | 우서(禹瑞),장륙당(藏六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우서(禹瑞), 호는 장륙당(藏六堂). 할아버지는 지돈령부사를 지낸 조존성(趙存性)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조계원(趙啓遠)이다. 부인은 신흠(申欽)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구석(趙龜錫)[1615~1665]은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1648년(인조 26) 정시 병과에 4위로 급제하여 승문원과 예문관의 여러 직책을 거쳤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경연에서 말한 내용을 누설한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지평, 이조좌랑,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61년(현종 2)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인조실록』 편찬에 세운 공으로 가자(加資)되고, 특별히 현종에게 궁전(弓箭)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전라 감사로 옮기고, 1663년(현종 4) 다시 승지가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라 감사 재직 당시 실결(實結)을 재결(災結)로 보고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병이 있어 동대문 밖에 서실(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1665년(현종 6) 불법으로 소나무를 벌목한 것과 관련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사후에 직첩을 돌려받았다.
[학문과 저술]
정철(鄭澈)의 아들이며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정홍명(鄭弘溟)에게서 학문을 배워 서인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저서로 『장륙당 유집(藏六堂遺集)』이 있다.
[묘소]
묘는 본래 양주군 치소(治所) 동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조말생 묘역에 있다. 석물 등은 모두 최근에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조구석의 행적에 대해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현종실록(顯宗實錄)』에서는 탐학하여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평가하였으나, 반대로 서인 주도로 편찬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서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나 이후 행적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온건하게 평가하였다.